오봉루에서 바라본 상경성 궁성 전경
발해국의 국격을 높인 상경성
- 발해의 모든 길은 상경으로
발해는 698년 건국 후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기까지 15대의 왕이 통치했다. 그중 고왕(高王), 2대 무왕(武王), 그리고 3대 문왕(文王)은 발해 건국의 기틀을 다진 왕들이다. 무왕의 영토 확장 이후 문왕 대에는 확대된 영역의 효율적인 통치와 관리를 위해 5경, 15부, 62주를 비롯해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을 하나씩 다듬어 나갔다. 5경은 동경(東京), 서경(西京), 중경(中京), 남경(南京), 상경(上京)이다. 문왕은 발전하는 발해의 국격에 맞게 그 이전까지의 수도였던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했다. 이후 상경은 잠시 동경으로의 천도 기간을 거쳐 발해가 멸망하기까지 발해 최대의 도성이 됐다. 그러고 보니 상경은 발해 도성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나아가 한국사 역대 국가들의 수도를 보더라도 최북방에 놓여있다.
발해는 이 상경성을 기점이면서 종점으로 하는 대외교통로를 설치했다. 바로 남쪽의 신라와 이어주는 신라도(新羅道),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한 영주도(營州道), 압록강과 상경성을 연결하는 압록도(鴨綠道), 거란과의 교통로인 거란도(契丹道), 그리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왕래하는 일본도(日本道) 등이 그것이다. 이들 대외교통로는 발해가 주변 나라들과의 교류를 위해 설치한 교통로로, 상경성은 바로 발해의 모든 길이 모이는 곳이었다.
발해 상경성의 입지와 구조
- 황제국에 걸맞은 왕성
상경성은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에 있다. 제3대 문왕이 755년 무렵 중경에서 이곳으로 천도했다. 785년 무렵 일시 동경으로 천도했다가 제5대 성왕(成王) 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 멸망할 때까지의 수도였다. 『요사(遼史)』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도 적혀 있는데, 이는 상경성이 관할하는 상경용천부가 홀한하(忽汗河), 즉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터는 외성(外城), 황성(皇城), 궁성(宮城)으로 구성돼 있다. 외성은 동서 4,900여m, 남북 3,400여m의 긴 네모꼴로서 높이 4m 정도의 토성으로 둘렀다. 성 밖에는 해자(垓子)를 만들었고, 네 모퉁이에는 각루(角樓)의 흔적도 남아 있다. 외성에는 모두 11개의 성문이 있었다.궁성은 북쪽 중심에 긴 네모형으로 만들고, 전체 둘레는 2,680m다. 각루와 해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궁성 정문은 오봉루(五鳳樓)라고 하고 축대와 주춧돌이 남아 있다. 오봉루에서 북쪽으로 제1, 2, 3, 4, 5 궁전지가 이어진다. 앞쪽의 두 궁전은 주로 정사를 보는 정전(正殿)이 되며 다음 궁전들은 편전과 침전공간이다. 특히 제4 궁전지에서는 난방을 위한 고래 시설이 보인다. 제2 궁전지 옆에는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란 우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어화원이라는 정원 터가 보존돼 있는데 이곳에 또 하나의 궁전 건물터가 있다. 황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좌경(左京)·우경(右京)으로 갈리고, 이것을 다시 여러 조방(條坊)으로 나눴다. 황성에는 삼성육부(三省六部)를 비롯한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외성 안에는 11개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돼 있어서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으로 (田) 자 모양을 이뤘다. 사지는 성 안팎에서 10여 기가 발견되는데 흥륭사(興隆寺)에는 발해 시대의 석등(石燈)과 석불(石佛)이 남아 있다. 성의 축조방식과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발해문화가 고구려를 계승하면서도 주변 나라들의 문화와 교류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상경성은 황제국에 걸맞은 왕성이었다.
상경성 내 팔보유리정
상경성 발해 석등
상경성 주변의 발해유적
우측 지도에서 보듯이 상경성이 위치한 영안을 중심으로 목단강을 지나 경박호에 이르는 구간에 발해유적지가 다수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아직 지표조사 단계여서 현재 상경성 주변의 발해유적의 면모를 살피기에는 앞으로 발굴 조사가 더 진행돼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음의 유적들은 비교적 발굴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곳의 유적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릉둔(三陵屯) 고분군은 삼령둔(三靈屯)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상경성에서 북쪽으로 현무호와 목단강을 지나 첫 번째로 나오는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다. 상경성과는 4㎞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여러 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그중 1호분은 이미 청나라 때에 도굴됐다. 1990년에 삼릉 1호묘 근처에서 2호묘, 곧이어 3호묘가 발견됐다. 삼릉둔 고분군을 포함하는 삼릉 왕릉구의 범위는 동서 길이 약 1,000m, 남북 너비 약 500m이다. 이 안에 3~4개의 독립된 능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홍준어장(虹魚場) 고분군이다. 상경성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다. 상경성의 북쪽 돌출부 북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곧 현무호(玄武湖)가 나온다. 이곳에서 연화촌(蓮花村)을 거쳐 북서쪽에 홍준어장 고분군이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발해 고분군 중 가장 많은 고분이 조사된 유적이다.
다시 상경성으로 상경할 채비를 하며
고왕 대조영의 건국 여정을 따라 발해유적 답사를 이어갈 때의 상경성 모습이 아련하다. 오봉루에 올라 본 상경성 주변은 이미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그때 그 어둠 한 켜 한 켜를 벗겨내 주며 발해국 궁성의 자태를 보여주는 달빛이 얼마나 정겹고 고마웠는지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그런지 상경성의 천년 깃든 넋은 지금도 은은한 달빛 속에서 그 위용을 더 잘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자욱하게 드리웠던 코로나 대유행의 안개가 걷혀간다. 이제야 저 상경성으로 또 상경할 채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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