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당안관은 『장징궈 일기(蔣經國日記)』를 정식 공개했다. 동 연구소는 세계적인 분쟁과 평화에 관심을 두고, 세계적으로 중요한 민간 문서를 수집 소장하기로 저명하다. 『장징궈 일기』는 1937년에서 1980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작성된 것인데, 1988년 중화민국 총통이던 장이 사망한 후, 유족들의 위탁을 받아 동 연구소에 보관해 오던 것이었다. 원 자료에 대한 복사나 촬영은 허용하지 않고, 열람만 가능한 방식이다. 사적 기록으로서 일기는 공적 기록에 의해 밝혀지지 않는, 복잡하고 미묘한 역사상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장점이 있다. 지금도 중요한 사료로 간주되는, 그의 친부(親父) 『장제스 일기』(『蔣介石日記』)(1915년~1972년)는 대표적인 예이다. 2004년 동 연구소가 같은 방식으로 일기를 공개하자, 항전사를 포함하여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역사적 공과를 재평가하는 붐이 일 정도로 학계에 미친 영향이 컸다. 이번에 공개하는 『장징궈 일기』 역시 그에 상응하는 파급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후 대만과 장징궈
장제스를 이어, 대만을 통치했던 장징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전기(傳記)가 있지만, 논자에 따라 호오가 뚜렷이 갈리는 편이다. 전후 대만에서 그가 수행했던 이중적 역할 때문이다. 반공을 명분으로 수많은 정치 사안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대만의 “백색 공포”를 주도한 독재자였다는 평가와 함께, 1970년대 행정원장으로서 대만의 고도성장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본토 엘리트를 다수 등용하는 등 ‘본토화’ 정책을 통해 대만의 민주화를 연착륙시키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일기는 이와 관련한 그의 행적들을 이면에서 깊이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기왕의 평가와 역사인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대만 정부가 중국에 뿌린 전단지. 대만에 가까워질수록 더 쉽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라고 써 있다. (출전 The Black Bats CIA Spy Flights over China from Taiwan 1951-1969, Chris Pocock, 2010)
물론 그의 일기가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개인적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나 전후 대만사에 대한 이해의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반공 맹방 관계였던 한국/자유중국과의 관계를 재조명하면서, 현재 본격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냉전사’ 연구를 추동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전후 대만’ 자체가 냉전을 매개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연동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속에서 장징궈가 수행했던 역할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장징궈와 냉전의 역설
우선 장징궈 스스로 정치적 입지를 다진 것은 내전에 참패한 이후 국민 정부가 대만으로 옮긴 이후였다. 그는 당시 전후 자유중국의 당·정·군의 정보와 정치교육, 그리고 국가 안전 및 적후 공작을 독자적으로 관장함으로써, 취약한 장제스 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반공을 구실로 한 수다한 정치 폭력과 정치범을 양산하였지만, (당)청년 간부 교육과 대중친화적인 정치작풍, 그리고 놀라울 만한 정보장악력을 바탕으로 발군의 정치적 수완을 과시함으로써 스스로 장제스에 이은 권력자이자 후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그의 정치력은 오랜 소련 체류 기간 획득한 공산주의식의 정치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1925년부터 1937년까지 소련에 체류하면서 먼저 모스크바 중산대학,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볼셰비키식 정치교육을 받았고, 소련 공청단과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또 이후 소련 군사정보국 특수학교와 홍군에서 정보 장교로서의 군사 및 정보 교육까지 받았다. 덩샤오핑(鄧小平), 랴오청즈(廖承志), 린쭈한(林祖涵) 등 중국 공산당원들이 중산대학(中山대학) 시절의 동급생이었다. 장은 그들과 함께 각종 학습과 대중 선전 등 조직 생활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물론 그의 소련생활은 애초부터 주시의 대상이었지만, 특히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 이후, 국공 및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는 소련 당국의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인질생활과 다름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련 공산당원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소련 특유의 정치 문화와 기술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주요한 정치 자산으로서 극단적인 반공정책을 추동하는 자원이 되었다. 그의 일기는 이러한 냉전의 역설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장징궈와 장제스
장징궈·미국·동아시아 냉전
그런데 또 하나의 역설 중의 하나는, 그는 항상 그를 사회주의로 의심하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줄곧 미국이 제공하는 경제 군사 원조를 모두 관장하였을 뿐 아니라, CIA가 주도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정책의 강력한 파트너로 활약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력 기초를 다졌다. 그 중에서도 그는 시종 미국과 함께 대륙을 정찰하거나 침투하는 다양한 적후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애초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쏠린 중공의 역량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에 따라 중국의 동남 연해에 대한 소규모의 교란작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흑묘중대(黑描中隊)”라는 이름의 비밀사업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그 작전 범위는 대륙의 전 지역에 걸치지만, 한반도나 인접 국가를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푸젠성으로 침투한 고공 정찰기는 베이징이나 텐진을 거쳐 동북에 필요한 삐라나 물자를 투하하거나 사람을 픽업한 뒤, 군산비행장에서 연료를 보충하여, 원래의 대만 신주(新竹)군사기지로 귀환하는 방식이었다. 서남 교계지역에 대한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1962년부터 1974년 봄까지 최소한 120차례 이상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작전을 장징궈는 시종 주도하였다. 특히 1962년에는 시안(西安), 바오터우(包頭)지역을 정찰하여, 중국의 핵무기 개발 관련 자료를 촬영한 적도 있다. 당시 장징궈는 이 사진을 들고 백악관으로 달려가 관련 시설을 제거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더욱 큰 군사원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물론 1964년 대륙의 핵실험 성공은 동아시아의 냉전지형을 바꿀 만큼 큰 이슈였고, 대만 역시 미국의 감시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핵개발에 매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대륙반공(大陸反攻)”으로 포장된, 적후 공작은 한국전쟁에서 시작됐고,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베트남과 인접하고 있는 서남오성 침투와 연계한 전략이 구상되기도 했다. 실제 장징궈는 베트남전쟁이나 인도네시아 내전에도 미국의 제지를 넘어설 만큼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사실상 대만의 냉전이 만주에서 빌미가 되어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냉전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장징궈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였는지, 그 내적 동력을 이해한다면, 바로 동아시아 냉전의 민낯과 본질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일기는 『장제스 일기』 이상으로, 동아시아 냉전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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