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말~10세기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 발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발해와 관련된 1차 사료와 새로 발견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해석의 다양성, 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발해사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고대 역사 자료는 일반적으로 문헌 자료가 기본이고, 그밖에 금석문이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고고발굴에서 발해의 금석문 자료가 세상에 드러났다. 현재까지 4건의 금석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모두 묘 주인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문이다. 그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고, 그중 두 명의 공주와 한 명의 황후는 발해 3대 왕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딸과 부인이다.
발해의 공주와 황후 관련 자료
발해 2대 무왕은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에는 신라가 참전하며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최초로 발견된 발해 정혜공주의 묘지
정혜공주묘지- 중국 길림성 돈화시 남쪽 약 5㎞, 육정산에서 1949년 발견, 7조각, 높이 90cm, 폭 49cm, 전체 21행, 725자 중 2/3판독
1949년 8월,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발해의 묘지가 최초로 발견된다. 깨어진 묘지는 725자 중 3분의 2만 알아볼 수 있었다. 대흥이 발해 3대 문왕의 연호였기 때문에 정효공주는 문왕의 공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주의 남편, 그리고 아들도 어린 나이에 앞서 죽었다. 공주는 40세 때인 보력 4년(777)죽고, ‘진릉의 서쪽 언덕’에 묻히게 된다. 묘지 발견을 계기로 돈화시 일대가 발해 건국지로 유력해졌다. 중국의 발해사 대가 김육불은 발해를 당의 번속(藩屬-종속) 국가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묘지에서 발해 왕이 ‘성(聖)’ ‘황(皇)’이라 하고, 묘를 능, 왕녀를 공주, 장자를 동궁이라 참칭하는 등 중조 황제와 같다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발해사가 중국사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국중점문물(우리의 국보에 해당)’을 1961년 1차 지정할 때 황제릉, 진시황릉과 함께 육정산고분군을 포함하였다.
정혜공주의 동생, 정효공주의 묘지 발견
정효공주묘지- 길림성 화룡 용두산에서 1980년 발견, 높이 105cm, 폭 58cm, 전체 18행, 728자 중 2자만 불명
1980년 길림성 화룡시 용두산에서 발해 정효공주의 묘지가 발견됐다. 묘지에 적힌 728자 중 2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판독 가능했다. 비문을 한자 한자 읽어가던 발굴자들은 깜짝 놀랐다. 묘지 내용이 30여 년 전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대부분 일치는 데다 정효공주가 정혜공주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의 넷째 딸이고 대흥 56년(792) 36세로 사망, ‘염곡의 서쪽 언덕’에 배장 되었다. 공주는 정혜공주와 마찬가지로 동궁(東宮)의 누이였고, 남편도 어린 딸도 일찍 죽었다. 정효공주와 그 남편일 것으로 추정되는 묘실의 인골은 여성 156㎝, 남성은 161㎝이고, 나이는 대략 25~45세로 추정된다. 묘실 벽에는 생전 공주를 시종하던 시위, 악사 등 12명의 발해인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용두산 부근 화룡시 일대가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인 현주(顯州)의 소재지임이 학계의 공인을 받았다.
발해 간왕의 황후, 순목황후
정혜, 정효공주에서 멈출 것 같던 발해사에 기적 같은 일이 최근 다시 일어났다. 2004년과 2005년 정효공주묘 주변을 확대 발굴하다 두 명의 발해 황후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그 중 한명이 9대 간왕(簡王, 재위 817-818)의 황후인 순목황후다. 묘지는 전체 141자 중 2자 이외에 모두 판독 가능했다. 현재까지는 앞에 예시한 29자만이 공개되었다.(사료3) 간왕의 배우자가 ‘왕비’가 아니라 ‘황후’이며, 순목황후의 성이 ‘태씨’이고, 간왕 사후 12년이 지나 선왕 건흥 12년(829)에 안장되었다는 것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수수께끼같은 효의황후의 정체
순목황후와 가까운 곳에서 문왕의 황후인 ‘효의황후’ 묘지도 발견됐다. ‘효의황후(孝懿皇后)’에 대해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이름 4자뿐이다. 묘지에는 분명 황후의 출자, 출생지, 자녀, 생활, 776년 사망한 문왕 왕비(『속일본기續日本紀』 보귀 7년조)와의 동일인 여부, 사망일시, 배장 여부, 문왕에 대한 내용 등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보고서에서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로 언급한 황후 ‘비문에 대한 연구’ 내용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언제 공개될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발해 왕이 황제를 칭하거나 혹은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가능한 빠른 시기에 전문이 공개되어 한중 학계가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발견되지 않는 발해 왕의 묘지
1대 고왕(대조영)과 2대 무왕의 묘는 정혜공주묘지의 ‘진릉’으로 추정하고, 육정산고분군에서 찾고 있다. 3대 문왕의 묘는 현재 용두산고분군 효의황후 옆으로, 간왕의 묘는 순목황후 옆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중국학계는 순목황후묘지 상의 ‘□릉(陵)’의 보이지 않는 부분 ‘□’이 ‘진(珍)’자일 것으로 추정하는 듯하다. 발해 건국지도 연길시 동쪽 10㎞ 떨어진 마반촌(磨盤村) 산성으로 비정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진릉’이 특정 왕의 묘가 아니라 용두산 일대의 왕실 묘역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때, 발해 건국 초의 국명이 ‘진국(震國 혹은 振國으로 표기)’인 점을 함께 고려하면, 진릉은 ‘진국의 왕릉’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발해 왕의 묘지는 왜 발견되지 않을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까? 공주묘지에서 나란히 누워있던 남편에 대한 언급은 왜 없을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발해 여성들은 묘지를 남겼는데, 세 사람이면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용감했다는 발해 남자들은 왜 묘지가 없는 것일까? ‘발해’는 ‘안개 자욱한(渤) 바다(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