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7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일본 정부와 군대가 부녀자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고 잔혹하게 유린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분명한 기록이 존재하지만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미루고 회피하기 바쁘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되짚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 중국 또한 예외는 아니다. 헤이룽장성 둥닝요새박물관 왕중런 연구원을 통해 둥닝 일본 관동군 요새에 세워진 위안소와 이곳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왕중런(王宗仁)
중국 둥닝요새박물관 연구원
우한 군구전략연구부와 후베이성 징먼시 사회과학원 근무 후 현재 둥닝요새박물관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중국 제2차 세계대전사연구회 이사, 중국 항련연구중심 부소장을 맡고 있다.
연구실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전후 정치, 군사와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第二次世界大战对战后政治,军事和国际关系的影响)」, 「2차대전 후의 고찰(二战后探讨)」, 「소련의 중국 동북지역 출병과 일본관동군의 투항(苏联出兵中国东北与日本关东军投降)」 등 근현대 중국역사를 연구했으며, 저서로 『뤼순에서 둥닝까지: 일본관동군 흥망기실(从旅顺到东宁: 日本关东军 兴亡记实)』이 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합작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도 등장했습니다. <22二十二>라는 영화가 중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22'의 의미는 2014년 촬영을 시작했을 당시 중국 내에 생존이 확인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숫자이고, 22명 안에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의 얘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는 얼마나 되고 조선에서 끌려간 할머니들도 생존해 있는지요?
A
<22>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한국측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촬영대상자 중 한 분이었던 고 박차순 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박할머니의 병원 치료를 돕고 있던 한국의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와 의기투합하여 공동으로 제작한 겁니다. 이 영화는 2017년 8월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에 맞춰 중국에서 상영에 성공하였지만 한중 동시 개봉은 하지 못했습니다. 둥닝요새 위안소에 계셨고, 현재는 한국 나눔의 집에 계시는 박옥선 할머니를 제외하고 중국에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현재 중국에는 '위안부' 명단에 등록된 생존자가 10여 명에 불과합니다. 남경의 일본군 위안소 옛터 전시관 등 관련 기관과 자원봉사자들이 정기적으로 생존자들과 연락하면서 미등록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 실태를 규명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합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둥닝요새박물관(东宁要塞博物馆)에서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둥닝요새박물관은 어떤 기관이며,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A
둥닝요새박물관은 국가로부터 예산을 전액 지원받는 사업 편성 기구입니다. 둥닝 요새를 연구의 일환으로 저희는 전쟁사, 강제노동, '위안부'에 대해 조사와 연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사료 발굴과 전쟁 유물 수집 업무도 저희의 일이죠. 일본군'위안부' 문제 또한 저희의 과업 중 하나이고, 빠른 시일 내 해결해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사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나 그 자손들이 조사에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에 실태 규명조차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Q
오래전에 중국에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인 박옥선 할머니를 만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할머님의 상황은 어땠나요? 그리고 한반도 출신 일본군'위안부'에게 관심을 두게 된 배경과 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A
20년 전에 '위안부' 생존자인 박옥선 할머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할머님은 건강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제가 쓴 책인 『여순에서 둥닝까지』의 세 번째 장 '5. 요새 성노예'에 박옥순 할머님이 겪으신 불행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서울에 와서 20년 전에 박옥선 할머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역사 재단에 제공했습니다.
제가 조선 '위안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부녀자들이 같은 비극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가 점령당한 뒤, 조선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일찍이 1905년 11월, 일본 제국주의는 일방적으로 혹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죠. 일본 제국주의는 이 '조약'을 근거로 조선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박탈했고, 조선에서 '통감 정치'를 시행합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일본 제국주의는 강제로 조선을 합병시켰습니다. 그리고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시작하죠. 일본 파쇼의 잔인한 유린 아래, 조선은 일본의 잔혹한 통치를 받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총독부를 세우면서 조선은 강산을 잃었고, 반도의 백성은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죠.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한반도의 백성은 어쩔 수 없는 고통 속에 살게 됩니다. 부녀자의 사회적 위치는 식민 통치와 함께 흔들렸고요. 중국도 조선과 똑같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1932년 3월, 일본은 중국 동북에 '만주국'을 세웠고, 중국 인민 또한 식민 통치의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부녀자의 사회적 위치는 없었고, 일부 부녀자는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되기도 했죠. 식민 통치로 인한 동요가 일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생활도 했고요. 점령당한 중국 동북은 제2의 조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Q
일본군이 둥닝 요새에 설치한 위안소가 꽤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둥닝 요새에 설치되었던 위안소는 얼마나 되고,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위안부'가 존재 했었나요?
A
일본군은 둥닝 179km 국경선에 총 4곳의 군사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둥닝(东宁) 요새, 수분하(绥芬河)요새, 녹명대(鹿鸣台) 요새, 관월대(观月台) 요새가 바로 그것인데요. 둥닝에 주둔한 군인은 13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곳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는 현재 공개된 것이 49곳이며, 둥닝이 광복을 맞았을 때 둥닝 지역에는 2,000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군은 끊임없이 침략 전쟁을 벌였는데요.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가 부족해지자 현지에서 젊은 여성을 모집합니다. 1934년 관동군은 톈진天津에 대형회사를 설립하고 중국과 한반도에서 다양한 명분으로 '위안부'와 노동자를 모집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요새 두 곳이 발굴되면 위안소 유적이 더 나타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위안부'에 대해서는 다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제도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안부' 제도가 생긴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군의관인 아소 데츠오(麻生徹男 )소위는 3년 동안 일본 육군을 조사해서 <아소 의견서>라는 것을 작성합니다. 이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종군 위안소'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됐는데요. 그 이유는 병사들의 왕성한 성욕으로 생겨나는 강간과 성병의 만연 등 불안 요소를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종군 위안소'의 기능을 '군대의 위생적인 성(性) 공중화장실'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사령부에 전달된 <아소 의견서>가 채택되면서 일본군은 병사의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한 기구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명시한 '위안부' 제도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인데요.
첫 번째, '병사 마음의 안정과 군 사기 진작'입니다. 일본은 병사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주입합니다. 그들에게 효율적으로 정치 교육이나 설득을 할 수 없었고, 병사들은 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병사 아즈마 시로의 일기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다. ‘다음 전투에서 죽는다면 지금 돈을 가진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열심히 다 써버려야지!’ 이 말은 광란의 열기를 일으켰다. 다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광란에 빠졌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병사들이 ‘위안부’를 품는 건 ‘난 아직 살아있다’를 증명하는 것이자 ‘내일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휴식 시간이면 위안소는 ‘목마른’ 병사들로 가득 찼던 겁니다.
두 번째는 '군기 유지와 전투력 강화'입니다. 성폭행 사건으로 관동군의 위엄이 떨어지고 항일 정서가 고조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든 것이죠. 하나 덧붙여 설명하자면 일본군은 병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여성은 그런 병사를 위해 몸을 바치는 걸 당연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또한 싸우기 전에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 운이 좋아져서 다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군인에게 성생활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여겼던 거죠.
세 번째 '위안부'의 역할은 '성병 예방과 승리에 대한 믿음 상승'입니다. 관동군은 위안소 설립 후 정기적으로 '위안부'의 신체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병사들 사이에 성병이 만연하는 것을 근절하려 한 것이죠. 관동군은 성병에 걸리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질병의 등급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군부는 전쟁으로 입은 부상을 1등 질병, 내과 질병을 2등 질병, 성병을 3등 질병으로 규정했는데요. 성병을 얻으면 다시 군인으로 발탁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군 전사 기록에 따르면 1917년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성병 환자가 전쟁으로 사망한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일본군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현지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강간했기 때문입니다.
1939년 4월, 일본군 제21군 군의관 장관 마츠무라(松村)가 육군성 군의관국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병사 100명당 '위안부' 1명의 비율로 위안 부대를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1940년 2월, 일본군 화북 전략군이 반포한 <간부의 위생 교육 순서>에도 성병이 일본군 전투력에 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요. 콘돔이나 성병 연고 등으로 성병을 예방하기도 했지만, 그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941년 7월, 관동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참모장 요시모토 테이치(吉本貞一)는 조선인 '위안부' 2만 명을 징집해 관동군 주둔지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선인 '위안부'를 비율에 따라 각 부대에 배치합니다.
1942년에 일본 육군성은 <전쟁 지역 강간죄 법안>을 제정하고 종군 '위안부'를 정식으로 군대의 배속 부대로 구성하고, 부족한 부분은 조선과 중국에서 모집합니다. 오랜 전쟁으로 좌절해 기가 꺾인 병사들을 위로한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일본 군사 당국은 전장에서 습격당하고 공격당해 사기가 떨어진 일본 병사들이 중국 '위안부'에게서 보상과 만족감을 얻고 이를 통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길 바랐습니다. 일본군의 '위안 제도’는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1945년 8월까지 이어졌습니다.
Q
'위안부' 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고 착취한 범죄 행위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둥닝 요새 박물관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A
중국 정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선에서 조금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위안부'가 일본 정부와 소송을 벌였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중국 '위안부'들은 TV를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들은 쉽게 나서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소송을 벌여도 이기지 못할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체면만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것과는 별개로 둥닝 요새 박물관은 둥닝 지역의 '위안부' 문제를 계속 조사해 나갈 생각입니다.
Q
중국 둥닝과 동북 지역에서 강제로 징집된 한반도 출신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현장 조사가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한국 학자들과 함께 조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주제는 어떤 게 있을까요?
A
일본군'위안부'와
관련한 연구와 조사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사를 계속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 발굴, 유적 발굴, '위안부' 관련 단서 찾기 그리고 일본군 노병의 기억을 통해 또 다른 단서를 찾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한국 학자들과 함께 조사를 진행하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