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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안중근의 삶과 동양 평화의 꿈
  •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구국을 위한 계몽·교육운동가, 의병운동가로 활동한 안중근(安重根, 1879.9.2-1910.3.26) 그러나 그의 수많은 업적 중 그를 가장 빛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일이다. 이는 단순히 이토라는 한 사람을 사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결행을 이끈 사상적 가치가 동양 평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다. 일본 법정에서 그가 외친 의거 이유는 안중근이란 인물에게 왜 주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것은 대한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의 삶에 영향을 준 부모와 천주교 신앙

 

안중근의 인물됨과 사상 형성에 미친 요인들을 여러 방면에서 조망할 수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건 그의 부모와 천주교다. 안중근은 부친 안태훈(安泰勳, 1862-1902)과 모친 조마리아(趙姓女, 1862-1927) 사이에서 3 1녀 중(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 안태훈은 안중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안태훈은 상무적 기질과 가풍을 가진 문중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는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양대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특했으며, 자라서는 4대조 순흥 안씨 문중 가운데 유일하게 문과 진사시에 급제해 향촌사회의 유력자가 되었다. 그는 안중근과 가족들에게 개화사상과 계몽사상 그리고 천주교를 받아들이는데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을사늑약 이후 가족 모두를 독립운동으로 이끄는 기반을 제공한다. 의협심과 무용심이 남달랐던 안중근의 기질과 성향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모친 조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의 정신적 지주였다. 조마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만큼 독립운동계에서 신망이 높았다. 1907 7월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려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모친에게 작별을 고할 때 조마리아는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안중근이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토 처단 의거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둔 안중근에게는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또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안중근보다 보름 늦게 태어난 그의 사촌 동생 안명근(安明根)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아들이 그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했다는 일화는 조마리아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순국 이후 남은 자식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아들의 유지를 이어간 장한 어머니였다


 

부친을 통해 수용한 천주교 신앙은 안중근과 그 가족에게 기존의 전통 가치 질서를 뛰어넘어 문명 개화론적인 사고를 갖게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천주교의 교리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내가 만일 프랑스 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한다.”고 하여 프랑스어 공부를 중단한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으나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라는 생각으로 천주교 신자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뤼순 법정에서성서에는 사람을 죽임을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을 때 수수방관하는 것도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을 뿐이다.”라고 한 것은 그의 신앙관이 순전히 교리에만 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중근에게 천주교는 인격도야와 함께 사회개혁의 원동력이었다. 1905 6월 국권 회복의 방안을 고민하다 상하이로 갔을 때 만난 르각 신부를 통해 교육 발달, 사회 확장, 단합, 실력 양성이라는 네 가지 구국의 길을 알게 되자 이를 명심하고 진남포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이는 천주교 신앙에서 비롯된 사회개혁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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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묵 ⓒ안중근의사기념관

 



구국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추진


1905년 가을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정세가 더욱 암울해지자 부친 안태훈과 상하이 망명을 추진한다. 그런 중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을 듣고 1906 1월 귀국해 진남포에 정착하게 된다. 진남포에서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민족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애국 계몽운동에 진력한다. 삼흥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2대 교장에 역임하며 1907 8월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학교 운영을 맡았다.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미곡상을 경영하는가 하면 석탄 판매회사인 삼합의를 운영하였기도 했다


 

1907 2월 대구에서 서상돈과 김광제가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된다. 그리고 1907 2월 평양 명륜당에서 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해 큰 성과를 거둔다. 이어 자신의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내어놓았고, 1907 5월에는 동생 정근과 공근도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모친 조마리아도 1907 5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납부하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해외 망명과 의병투쟁의 길

 

1907 8월 군대 해산의 참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구국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망명길에 오른다. 그해 8월 부산-원산-청진을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간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그곳의 천주교도들은 민족정신이 박약한 데다 일제 통감부가 파출소를 설치해 감시·통제하는 통에 활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11 25일 블라디보스톡(海蔘威)으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1909 10월까지 약 2년 동안 안중근은 러시아령 연해주를 중심으로 구국활동에 매진하였다.


 

안중근의 연해주 활동은 동포 교육과 의병 경영이었다. 동포 교육은 학교 설립이나 후학 양성이 아니라 동포를 순방하고 연설과 유세를 통한 교육이었는데 그 목적은 의병운동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범윤과 최재형을 만났고 이들이 1908 4월 연추 최재형 집에서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를 설립하자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안중근은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회 의병부대의 우영장으로, 이범윤이 이끄는 창의군 의병부대와 연합해 1908 7월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한다. 그 결과 홍의동전투, 신아산전투는 승리로 이끌었지만 7 21일 회령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당한 뒤 귀환 과정에서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제 굴하지 않고 다시 기력을 회복해 2차 의병을 준비하려 했지만 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당국이 의병활동을 금지한데다 최재형 세력과 이범윤 세력 간의 알력과 분열 대립이 심해지면서 연해주 의병운동의 사조가 급격히 퇴조했기 때문이다. 대신 1908 11월 『대동공보』를 창간하는 등 교육과 문화를 통한 구국운동으로 전환한다. 러시아 한인사회의 협력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안중근은 1909 2 26일 연추 교외의 하리(下里)에서 동의단지회(일명단지동맹’)를 결성한다. 회장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동지가 결성한 단지동맹은 후일 의병운동 재개를 위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구국항쟁을 결의할 때,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을 통해 이토가 만주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얻자 안중근은 이토 처단을 새 목표로 설정하고 의거를 결행한다.



동양 평화의 꿈


안중근은 1909 10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의거 직후 그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 이토를 처단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은 의병참모중장이며 자신의 행위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독립전쟁이기에, 전쟁포로로서 만국공법에 따라 재판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안중근 의거를 폄하하기 위해 이토에 대한 사적인 원한과 공명심에 의한 테러행위로 몰고 갔다. 이는 안중근이 역설한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라는 공공의 대의를 묵살하려는 의도적인 무시였다. 일본은 안중근 의거의 파장을 최대한 축소 은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재판을 일본 정부 의도대로 신속하게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 병합 의도를 은폐시키고 열강들의 개입을 회피해 한국인들의 독립의지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안중근 의거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촉진한 게 아니라,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에 대한 본질을 전 세계에 폭로함과 동시에 직접 타격을 가한 의거였다


 

1909 11 3일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은 이듬해 3 26일 순국할 때까지 자신의 일생 행적을 밝히는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저술한다. 이어서 『동양평화론』 집필에 착수해 후대에 자신이 결행한 의거의 뜻을 밝히고자 했다.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은 집필을 완성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순국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짧은 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생각과 사상은 14회에 걸친 신문 내용과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와의 면담 초록인청취서’, 통역인 소노키 스에키(圓本末喜)수기등의 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보충되고 있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일본 삼국이 일치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 평화의 범주는 삼국은 물론 태국, 미얀마까지 그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각자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가 이뤄진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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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안중근의사긴

 

 

 

동양평화론의 내용과 특징 


구체적으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다음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일본은 여순을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삼국은 이곳에 대표를 파견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동양평화회의 회원에게 회비를 모금해 재정을 충당하게 하면 수억 명의 삼국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 둘째, 원활한 금융을 위해 삼국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발행한다. 셋째, 삼국 공동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가르치면 서로 우방으로 생각하게 되고 형제의 관념이 높아질 것이다. 넷째, ·중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일 삼국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면 세계 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는 당시 일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인종주의), 동양맹주론과 구조적인 동일성을 가지면서도 반침략주의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민족과 동양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당시 동양을 침략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해 독립과 평화를 지키는 것이지 서양인 그 자체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 편협한 아시아주의와 같은 인종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그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 31세의 청년이 20세기 초두 동아시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침략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조국의 위기를 염려하는 탁월한 역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동양평화론이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한 구상은 대부분 입으로는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민족과 국가에 한정된 폐쇄적 성격을 지녔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안중근은 보편적 세계를 지향하는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해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의 동양평화사상은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21세기형 평화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