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도연구소에 들어와서 어느새 2019년을 맞았다.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그 사이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 독도를 방문했다. 맨 처음 독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커다란 돌섬이 동해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초여름 독도에서 동도 주변을 조용히 둘러봤을 때는 처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등 뒤에서 세차게 바람이 불었고 선착장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저 멀리 수평선에는 하늘과 파도가 맞닿아 있었는데 파란 하늘과 연파랑 파도가 처음부터 하나인 듯 이어져 있었다. 에메랄드 파도가 눈부시게 부서지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비가 한두 방울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밀려오는 차가움과 서늘함의 교차, 그 아스라한 촉감이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눈부신 에메랄드빛이 나에게 스며들 듯 다가왔고 나는 마법에 걸린 듯 독도에 관한 학술서를 쓰자, 마음먹었다.
독도 주권과 제국주의
영토의식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을 전후해 ‘민족’의 연대감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영토의식과는 달리 자신의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고 이미 살고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영토의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문제의 소지를 지니고 있다. 특히 19세기의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은 독도와 동해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앞다투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주권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라 제국주의 그리고 과거사 청산과 그 맥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일본, 러시아의 자료를 통해 본 독도와 울릉도
영토·영해 관련 국제법 판례의 중요 원칙 중 역사적 권원, 국가행정 관할의 증거 등을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은 근대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한국, 일본, 러시아의 자료를 교차, 분석하면서 그 시각의 변천을 되짚고 있다. 대한제국 성립과 연결되어 1900년을 기준으로 이전 시기는 1부 ‘러·일의 해양탐사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이후 시기는 2부 ‘러·일의 울릉도, 독도 조사. 대한제국의 영토해양 인식과 정책’으로 구성했다.
제1부에서는 19세기 중엽 러시아 작가 곤차로프의 조선 동해안 여행기 『전함 팔라다호』와 러시아 뻬쩨르부르크 해군함대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조선 동해안 관련 자료 그리고 올리부차호의 항해 일지 등을 통해 러시아의 한반도 동해안 탐사 내력을 살펴본다. 19세기 해양탐사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고, 극동지역에 대한 러시아 해군력 증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제기된 ‘송도개척론’과, 그 주창자이며 블라디보스톡 무역사무관이었던 세와키 히사토의 ‘송도개척원’의 검토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식 명칭인‘송도’와 ‘죽도’가 착종되는 현상을 추적해 보았다. 또한 그것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조선 고종기에 울릉도 검찰사로 파견된 이규원의 사례를 들어 당시 고종이 울릉도에 대해서 강한 영토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 침입이 조일 외교 문제로 떠올랐던 사실을 지적한다. 1900년 10월 25일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명시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제정된 것 역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 거주를 막기 위한 행정체제 구축의 일환이었음을 확인한다.
2부 ‘러·일의 울릉도, 독도조사. 대한제국의 영토해양 인식과 정책’에서 다루는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는 외교관 뽀지오의 「한국개관」, 러시아 재무부의 「한국지」, 동방학자 뀨네르의 「한국개관」 등의 자료가 출간되며 한국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 나갔다. 이들 자료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며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한편 러시아 군함은 1899년부터 1903년까지 본격적으로 울릉도에 체류하면서 울릉도의 지형을 조사했는데 이는 러일전쟁을 예상하고 일본과의 해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일본은 나카이 요자부로를 필두로 한 어업종사자의 독도 편입 주장을 받아들여 오키도사(隱岐島司) 히가시 분스케(東文輔) 는 독도의 새로운 명칭을 ‘죽도’로 작명할 정도로 깊숙이 개입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부터 1906년까지 울릉도와 독도의 지형과 어업 상황을 본격적으로 조사했다. 하지만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명문화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1945년 시마네현 청사가 전소될 때 ‘고시 40호’의 원본 역시 소실되었다. 또한 1905년 당시 신문 등 매체에 독도에 대한 언급이 공식적으로 게재된 적이 없고, 현재 일본에서 내세우는 고시문은 다른 일반 공문서와 달리 필기체가 아닌 인쇄체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사본의 증거도 의심되는 실정이다.
영토를 통해 제국의 이중성을 확인하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러시아와 일본이 제국주의를 지향하면서 권력과 인간을 일치시켜, 영토를 확장하려는 이중성을 살펴보았다. 특히 일본 정부는 수산업자 나카이 요자부로를 활용하고 일본 어민의 ‘애국심’을 작동시켜,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경제적인 침투를 비호하면서 독도에 대한 불법적인 영토 편입을 정당화시켰다. 러시아 정부는 상인 브리네르를 동원해 울릉도 삼림개발 이권을 획득하게 만든 다음,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를 해양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제국이라는 권력은 패권 추구와 세력권 형성을 특징으로 식민 정책을 통한 풍요로운 국가를 약속하면서, 자국민의 상업적 활동을 권장하는 동시에 자국민을 군사적 침략의 도구로 적극 활용한 것이다. 근대 동북아에서 제국의 이중적 모습이 울릉도와 독도를 배경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