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4운동 100주년 풍경을 조망하다
금년은 3·1운동과 함께 5·4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9년 북경대학생의 반일 시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던 5·4운동은 이후 일체의 불합리한 관행과 억압에 대한 정치사상 문화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 당국은 5·4운동 100주년을 어떻게 기념했을까? 중국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역사를 동원하는 관행이 있었고, 특히 최근에는 10주년마다 5·4운동을 기념하면서 현재적 의미를 제시해 왔다. 그래서 5·4운동 100주년 통해 지난 100년을 어떻게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해 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결론만 말하자면 금년 5·4운동 기념일은 과거와는 달리 조용히 치러졌다. 형식도,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소소한 회의를 제외하고는 베이징대의 ‘5·4와 현대 중국’이라는 국제회의(3월 30일), 그리고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가 주관한 ‘5·4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회의’(4월 27~28일) 정도다. 전자는 토론 없는 대중 강연과 학술회의였고, 후자는 베이징 시내에서 먼 외곽의 한 호텔에서 일반 청중 없이 전문가 토론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5·4운동과 관련해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문학, 일상, 문화 등 ‘비정치적’, ‘주변적’인 요소들을 논하지만 획기(劃期)로서 5·4운동의 의미는 약화된 것이 추세인 듯하다. 5·4운동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극도로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5·4운동은 ‘청년들의 애국운동이었지만, 지나친 반 전통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시진핑 식의 해석이 전제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역사에 대한 당국의 독점적 해석권을 훨씬 강화하는 현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당국이 이야기하는 애국주의는 강대한 중국을 위해서는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된다는 독재 논리와 가깝기 때문에 민주, 과학 등 계몽성, 반 전제에 대한 저항성을 핵심으로 하는 5·4운동의 가치와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비난도 있다. 실제 역대 정권들은 5·4운동을 청년절 또는 문예절로 부르면서도 그것을 탈정치화하고 억압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탄압에는 장력이 작동하기 마련이어서, 5·4운동은 혁명의 권위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문명적 저항 운동의 상징으로서 소환되곤 했다. 국민정부 시기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대응에서, 89년 천안문 사건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저항운동에는 민주(德先生你好: 안녕 민주주의)와 오사(再又五四 :오사여 다시 한 번)가 구호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의 경우처럼 조급증에 시달린 지도자가 애국, 혁명 따위를 명분으로 국민 동원에 몰두하면서, 5·4 정신을 압살하였을 때 그것은 집단적 재앙으로 이어졌다. 5·4에 대한 국가적 기념과는 달리, 5·4운동이 제기한 민주와 자유, 과학은 ‘집단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모든 희생을 강요하는 반문명적 폭압에 대한 문명적 저항의 정신으로 계승된 것이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해석을 독점하고 국민을 통제하려는 우매한 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5·4운동을 바라보는 조선의 시선과 동아시아라는 사상 공간
5·4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른바 동아시아라는 사상 공간이다. 5·4운동은 3·1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시간적인 인접성도 있지만 5·4운동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산동권익 처리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된 민족운동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당시 양국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민국일보(民國日報)」, 「신보(晨報)」등 중국 언론은 3·1운동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입각한 혁명운동이자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망동, 난동과 소요로 간주하던 일제의 신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히 진독수(陳獨秀), 부사년(傅斯年) 등 5·4운동의 주역들은 3·1운동을 1차 대전 이후 “민족자결”과 “민주주의”를, 19세기 이래 세계를 지배했던 “강권(强權)”적 질서를 대신한 새로운 “공리(公理)”로서 이해하고 공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변화가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었음을 환영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식인은 5·4운동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5·4운동과 그 이후 중국의 동향에 대해 면밀하게 주목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5·4운동을 “북경대 학생이 의분을 일으킨 날, 전국의 학생들이 이에 향응한 날, 신문화(新文化)가 구세력에 대하여 궐기한 날, 민주주의가 관료주의에 반항하여 일어난 날, 민족자결주의가 침략주의에 선전(宣戰)한 날”로 규정했다. 또 5·4운동이 파리회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한 배일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곧 새로운 사상운동과 문화운동, 사회 혁신 운동으로 전화하고 있음을 목도했다. 5·4운동이 본질과 형식면에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니,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일국적인 의미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 국면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각했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새로운 사회 문화 운동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5·4와 3·1이라는 미증유의 대중운동 경험이 동아시아 사상공간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제기되는 사상적 과제를 상호 연계해 추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5·4운동 이후 중국이 ‘국고정리운동(國故整理運動)’을 통해 새로운 학술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같이 조선의 학인들 역시 적극적으로 조선학 운동을 추진했다. 양국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된 새로운 학술운동은 동아시아라는 사상 공간의 재편과 심화를 의미했다. 다만 여기서 기억 할 것은 이러한 사상 공간의 변화가 꼭 한중의 연대로 나타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베이징대학은 5·4운동 이후 학제를 개편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관심에서 조선사 강좌를 개설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을 초빙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에는 조선사를 연구하고 강의할 수 있는 조선인 중심의 제도와 연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북경대학 고고 연구실은 일본의 고고학자들과 함께 중일 공동으로 동아고고학회를 조직해 학술교류를 진행했다. 일본의 낙랑 발굴에 북경대학 교수 마형(馬衡)이 참관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후 이러한 학술교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제가 생산한 조선사 연구 결과는 고스란히 중국 학계에서도 승인되고 확산되었다. 황염배(黃炎培)의 『조선(朝鮮)』과 같은 대중용 서술이나, 부사년(傅斯年)의 『동북사강(東北史綱)』등이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동아시아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세가치를 창출하고, 학술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과제를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