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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 널리 알려야
  • 서현주 재단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지난 5월 13일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총탄이 폭풍처럼 빗발치는 가운데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휴식을 시켜주려고 생각한다면 위안부제도가 필요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당시 세계 각국이 위안부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일본의 위안부 제도만이 거론되고 있는가? 일본이 군을 이용하여 국가 차원에서 강간을 했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일본정부가 폭행, 위협해서 납치한 사실은 증거에 의해 입증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시모토의 이 발언은 당일 자 아사히신문에 보도되어 국내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우리 외교부 대변인은 "여성 존엄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를 왜곡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고 비판했으며, 중국 외교부의 대변인도 "인류의 양심과 역사의 정의에 대한 도발로 강렬한 분개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눔의집

 

하시모토 위안부 관련 발언 국제적 비판 받아

비판은 대양 너머에서도 날아왔다. 5월 16일(현지 시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당시 성을 목적으로 인신매매된 여성들에게 일어난 일은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지적했다. 또 하원 외교위원장인 에드 로이스의원은 하원 본회의에서 의사 진행 발언을 신청해 "위안부는 (일본) 정부가 후원한 성적 만행 프로그램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국제규범을 모두 거스르는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뉴욕타임즈 등 주요신문도 "독일은 수십 년 전에 역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유럽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왜 일본은 아직까지도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왜곡하느냐"며 일본비판에 나섰다.

발언의 진의를 밝히겠다며 5월 27일에 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도 하시모토는 "위안부제도는 필요했다"거나 "일본 정부나 군이 조직적으로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증거는 없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러한 하시모토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 하원에 제출된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막기 위해 일본 국회의원과 지식인, 저널리스트들의 연명으로 워싱턴포스트 지(2007년 6월 14일)에 게재한 광고 '사실(The Facts)'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5년이 지난 2012년 11월 4일,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미 뉴저지 주 지역신문 스타 레저(Star Ledger)에 아베 현 총리까지 찬성자에 이름을 넣어 실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광고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오로지 '강제연행'의 유무를 가지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과 정부의 책임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편협한 태도는 그 이외의 형태이면 군과 정부의 관여는 어느 것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문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부정하고싶은 다음과 같은 현실, 즉 일본군이 '위안소' 제도를 만들고 유지, 확대시켰으며 업자를 시켰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군의 수족으로 일을 시켰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공문서로 충분히 입증된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 자료와 네덜란드정부조사 보고서 등의 문서 자료와 위안부 피해자, 군인들의 증언이 위안부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연행 증거 없다" 주장은 근거 매우 취약해

동아시아 전역 위안소 지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1938년 6월 27일 북중국방면군 참모장 오카베 나오자부로(岡部直三郞)는 '군인 군대의 대주민 행위에 관한 주의 건 통첩'이라는 지시에서 "…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강간은 (중략) 치안을 혼란하게 하여 군 전반의 작전 행동을 저해함으로써 국가에 누를 끼치는 중대한 반역 행위(중략) 가능한 한 신속히 성적 위안 설비를 만들어, 설비가 없기때문에 본의 아니게 죄를 범한 자가 없도록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지시했다. 업자와 군의 관계는 1938년 3월 4일 육군성 부관이 육군차관의 결재를 받아 북부 및 중부파견군 참모장에게 보낸 통첩(육지밀 제745호)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육군성은 통첩에서 중국지역에서 위안소를 설치하기 위해 일본 국내에서 종업부 등을 모집할 때 군부 양해 등의 명의를 이용하여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 시민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향후 각 파견군이 징집 업무를 통제하고 업자 선정에 보다 철저를 기하며, 징집 시에는 현지의 경찰·헌병과 긴밀히 연대하여 군의 위신유지와 사회문제 상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하시모토가 27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위안부 이동에 배(군함)를 이용하고 위안소 운영과 관리에 일본군이 관여한 것은 맞다"고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것도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 및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 내세운 논리가 당시에는 위안부와 그 전제라고 주장된 공창제도가 다른 나라와 군대에도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 삼을 수 없으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는 정부와 군이 조직적으로 납치나 인신매매를 했을 경우 뿐 인데, 현재까지 그 같은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공창제가 흔한 것이었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유럽 각국은 공창제도가 여성의 매매를 조장한다고 인식하여 1920년대가 되면 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식민지에서도 공창제를 폐지하여 갔다. 영국·미국·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에서 성매매 업소의 폐쇄, 성매매 여성의 본국 귀국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920-30년대에 공창제도 폐지운동이 전개되어 10여 개 현에서 공창 폐지 결의가 이루어졌다.

"정부·군의 조직적 납치 있어야 책임" 주장도 일본국내법 위반

정부와 군이 조직적으로 납치나 인신매매를 한 경우에만 책임이 있다는 주장 역시 당시의 국제적 규범은 물론 일본 국내 법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국제연맹은 1921년 부녀매매 금지 국제조약을 제정하여 21세 미만 여성에 대한 모든 성매매 권유와 21세 이상 여성에게 사기, 폭행, 협박 등 일체의 강제적 수단으로 성매매를 권유하는 것을 금지시켰다(일본은 1 925년 이 조약에 가입했다). 또 일본 형법 제226조는 국외이송을 목적으로 한 약취(폭행이나 협박으로 사실상 지배하에 두는 것)만이 아니라 유괴(기망 혹은 유혹을 수단으로 해서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것)과 인신매매(대가를 받고 사람의 몸을 주고 받는 것)도 동일하게 범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 조항에 의해 처벌받은 사람도 있다.

아울러 현재까지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하시모토 스스로 새로운 증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각의결정이 5월 7일 나왔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달았듯이 그 근거가 허술하기 그지없다. 극동국제군사재판 자료와 네덜란드 정부조사보고서 등의 문서 자료와 위안부 피해자, 군인들의 증언이 위안부 강제 동원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시모토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몰이해, 자의적 해석으로 점철되어,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일본 병사의 성 상대가 될 것을 강요한 성노예제라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상당히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하시모토와 마찬가지로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를 부정하고 있는 아베의 역사인식이 일본의 외교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한 응답(44%)이 부정적이라는 대답(26%)을 크게 웃돌고 있는 것(6월 11일 아사히신문 조사 발표)이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