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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깨어있는 지성인만이 국가와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어 학계 원로에게 국내와 동아시아 역사갈등 헤쳐나갈 길을 묻다
  • 기록·정리 ┃ 설원태 홍보교육실 수석행정원

동아시아 3국간의 역사문제를 다루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외교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재단은 최근 고조되고 있는 동북아지역의 역사갈등을 염두에 두고 역사학계의 원로이자 주핀란드 대사와 주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사학회 고문)을 만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국내의 역사 갈등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했다. 러시아사 전문가이면서 한국사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성쇠에는 그 나라의 깨어있는 지성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고 역설했다. 이인호교수와의 심층좌담은 6월 10일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실에서 진행됐고, 재단측에서는 최덕규 역사연구실 2팀장이 좌담자로 나섰다. 최 팀장은 우선 이인호 이사장의 외증조부이자 구한말 조청국경문제를 의연하게 풀어간 이중하(李重夏)의 얘기로부터 대화의 문을 열었다. _ 편집자 주

최덕규(崔悳圭) 재단 역사연구실 2팀장

한양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교사와 동북아국제관계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으로 있다. 주요연구로는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2012), 「고종황제의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구상」(2011), 『제정러시아의 한반도정책(1891-1907)』(2008)등이 있다.

이인호(李仁浩)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중퇴한 뒤 미국 웰슬리대 역사학과 학사, 하버드대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 및 럿거스대에서 강의했으며, 귀국한 이래 고려대 및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 주 핀란드 대사, 주 러시아 대사 등으로 정부의 외교현장에서도 근무했다. 이어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명지대 석좌교수, 카이스트 석좌교수를 역임한 뒤 2011년부터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최덕규 재단 역사연구실 2팀장

Q 최덕규 교수님은 1887년 조청 국경문제를 다루었던 대한제국의 애국충신 이중하(李重夏)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아당(二雅堂)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면서 국경문제에 관한 한 청국 대표의 요구를 끝내 거절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선 그 분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이인호 당시 대한제국은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려 발버둥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중하의 문집을 보면, 고종 황제에게 보고했을 때 "어쩔 수없이 영토의 일부분을 빼앗긴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중하는 대한제국의 경계선 밖에 있게 되는 한인들이 최소한 자국영토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겠다면서 분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 분이 최소한 일반 백성들의 삶에 대해 배려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일시 한국정부의 외교업무를 했던 사람으로서 한말 당시를 생각하면, 작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외국어로 국경문제를 놓고 우리 주장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차원에서 당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선조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어느 나라의 힘을 빌려야 나라의 주권을 지킬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한제국의 내부문제, 주변 강대국들의 움직임 등을 모두 포함해 대한제국의 흥망사를 다각도로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국제관계는 대한제국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다만 한문으로 기록된 이중하 문집을 놓고도 역사전공자인 제가 한문 실력이 모자라 원문을 못 읽고 번역문을 보면서 선조와 대화할 수 밖에 없음은 아쉽고도 부끄럽습니다.

Q 최덕규 우리는 역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역사지식은 상대적으로 얕아지고 있습니다.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이인호 저는 우리의 역사인식 부박화(浮薄化) 및 무미건조한 역사교육 방법에 대해 오래 전부터 비판해 왔습니다. 역사교육은 위인전, 말하자면 이야기로서의 재미있는 역사를 배워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런 역사교육 구조가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어에서 '역사'를 의미하는 단어 '이스토리아'는 '이야기'의 뜻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은 인간과 사회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역사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됐습니다. 어린이, 초중등 학생, 대학생 등 수준별로 이해 가능한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역사공부는 재미있어야 하고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역사는 '재미없는 과목'으로 인식돼 있습니다. 역사교육은 주로 어렵고 딱딱한 지식의 축적으로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해 전 역사교과서 제작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책을 만들라"면서 촉박한 일정을 정해 주었고, 그 비용도 KBS 드라마의 가장 싼 제작비 정도의 낮은 비용을 투입해 역사교과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50세 미만의 '젊은' 역사연구자들이 제시하는 운동권적 시각이 담긴 역사인식이 역사학계에 들어왔고, 이들의 역사인식은 깊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집권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최근 치적을 조명하는 역사책을 만들다 보니 역사인식의 왜곡이 심각해졌습니다. 저보다 젊은 학자들이 역사책을 만들다 보니 북한에 대해 우호적 시각을 반영하는가 하면, 한국에 대해서는 친일·친미적이라며 부정적 시각을 반영한 잘못된 역사교육을 해 왔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으니, 일본등 인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당당한 대응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예컨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는 상반된 개념입니다. 단순히 민주주의로만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틀을 지키면서 역사인식에 관한 논쟁을 해야 합니다. 간혹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보면 북한의 시각이 반영된 듯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광복이후 한국과 북한은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심대합니다. 학생들이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역사의 정당성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Q 최덕규 교수님은 러시아사 전공자이지만 러시아사와 한국사의 접점에 섰던 경험을 하셨습니다. 혹시 한국사의 편린이 러시아사에서도 발견됩니까? 그리고, 역사학자와 외교관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요?

A 이인호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제가 러시아 대사로 나가기 전 또는 후였을 겁니다. 저는 러시아가 혼란기에 있던 그 시기에 러시아 외교부의 문서고(러시아어로 '아르히브')에서 고종황제에 관한 원문 기록을 직접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고종 황제는 역사적으로 잘 조명돼야 하는 분입니다. 제가 아르히브에서 발견한 A4용지 절반 크기 정도의 종이에 쓰인 기록에 의하면, 고종이 니콜라이 II세의 대관식에 참석할 충정공 민영환에게 권총, 망원경, 도수 높은 안경, 그리고 농기구를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종의 당시 상황이 거의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매우 답답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 때문에 앞의 3가지 물건의 필요성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농기구의 경우, 당시 러시아가 농업대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농업발전에 대한 고종의 관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학자로서 러시아의 문서고에 직접 들어가 원문을 접했다는 사실은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문서고의 자료들을 보면서 학자로서 연구할 자료가 무궁무진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러시아의 문서고는 독일식으로 관리되고 있었으며, 어느 날 누가 와서 무엇을 보았다는 식으로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기록문화가 발달해 있어 별별 것이 다 기록돼 있습니다. 아마도 러시아 기록들을 뒤져보면, 당시 러시아의 내부상황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당시 대한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나아가 당시 국제상황이 어떠했는지도 더욱 깊이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부터 외무부의 아시아국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Q 최덕규 교수님은 국내에서 러시아사 연구의 토대를 닦으셨고,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내셨습니다. 탈냉전 시대에 들어 국내에서는 러시아사 연구가 좀 주춤해진 듯합니다만.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A 이인호 사실은 한국에서는 (냉전시기 동안) 용공(容共)의 소지가 있어서 불행하게도 러시아 연구를 깊이 있게 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초기에 외대에 러시아어과가 있었으나 다른 대학에서는 러시아에 관심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제가 1972년 미국에서 귀국한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반공적 시각에서 러시아를 공부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다음 러시아 혁명은 혁명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목소리가 대두되었죠. 그러나 스탈린 시대를 미화하는 국내 운동권의 시각이 확산되면서 연구의 초점 없어졌습니다. 운동가들이 혁명지상주의 관점에서 러시아를 보니 잘못 보는 겁니다. 가끔 저의 강의내용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하에서 국내에서는 진정한 러시아 연구가 없었습니다. 러시아혁명은 우리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거의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냉전 체제하에서 공산주의 진원지인 러시아 혁명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인해 러시아, 마르크스·레닌주의, 북한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들 나라와 한국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의 변화와 연결해 깊이 연구해야 한·러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와 수교하면서 외대·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는 우후죽순격으로 노어과가 생겼습니다. 이 때 러시아 연구가 반짝 떠올랐을 뿐 연구의 토대가 쌓일 수는 없었습니다. 러시아 유학 1세대의 연구자들의 관심은 혁명에 있었을 뿐이며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러시아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10여년 남짓 기간 동안 러시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움트고 있는 듯합니다. 러시아와 한국은 나라 크기 등 다른 점들이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민족성 등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과 유사성도 많습니다. 러시아는 20세기에 들어와 강국이 됐으나 여전히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유풍이 남아있어 서양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특히 국민의 법의식 등 측면에서는 한국인과 유사합니다. 예컨대, 저의 미국 유학시절 러시아어를 배울 때 "(식사 시간에) 안 잡수시겠느냐"는 인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고 후에 들었습니다. 음식을 내놓고 (당연히) "드십시다"하는 것이 러시아식 표현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의 표현이 한두 세대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비만 방지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는 상황이 도래해 식사 때의 인사 표현이 변화하는 점도 양국이 유사합니다. 러시아는 대단한 나라이지만, 러시아 국민은 잘 사는 게 아닙니다. 러시아에는 혁명정권이 탄생하자마자 적대세력들이 등장해 국가는 국민생활에 신경 쓸 수 없었습니다. 그후 신경제계획(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 러시아가 산업화의 길을 걸었으나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산업을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Q 최덕규 한국과 러시아사에 대한 비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역사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동아시아 역사문제의 싱크탱크로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단의 이사로서 재단 임직원들에게 주는 유익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A 이인호 재단 연구원 및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노력한다고 알고있습니다. 재단에서는 연간 50~60여권 등 많은 연구서가 나옵니다. 그러나 재단은 동북아 및 세계의 학계와 좀더 폭넓은 교류를 해야 하고, 동시에 일본·중국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인식을 하기 바랍니다. 재단이 동북아 역사를 더 깊이 연구하면서 기초를 더욱 단단히 해야 합니다. 돈만 주고 외부 용역으로 연구하라고 하면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아울러, 재단에는 동북아역사에 정통한 사람들이 들어와 연구도 하고 연구지원도 많이 해야 할 겁니다. 동북아역사 연구 외에도 다른 지역 연구도 물론 중요하죠. 다른 연구기관에서 연구할 사람도 없는데 연구비가 투입되는 사례들을 이전에 본 적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연구인력을 키워서 연구에 몰두해야 합니다. 아울러 재단이 만든 자료들이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 꾸준히 점검해야 합니다. 재단은 다른 데 없는 정보를 많이 갖고 있어요. 민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재단이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또한 재단은 국제적 교류를 더욱 활발히 해야 합니다. 글로벌화된 현재 인근 국가들의 연구동향을 수시로 관찰하면서 재단의 연구를 국제적 통용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선진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Q 최덕규 혹시 교수님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저서나 논문이 있는지요?

A 이인호 세르게이 불가코프(러시아 종교철학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경제철학'이 탁월한 논문으로서 저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모든 관심은 경제(돈)에 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보다 더 근본주의적 경제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돈의 가치로만 보았으나 그는 "보상이 있든 없든 살아있다는 증거로서 경제활동을 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소피아 철학). 1917년 혁명 이후 그는 성직자가 됐고, 파리에서 러시아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일하다 별세했습니다. 그의 러시아어 논문이 다른 언어로 번역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고, 특히 그의 논문이 영어나 독일어로 쓰였더라면 그의 사상이 더욱 널리 전파됐을 것입니다.

Q 최덕규 마지막으로, 향후 연구계획을 들려 주십시오.

A 이인호 향후 지성사나 사상사를 연구하고 싶습니다. 지식인들이 현실을 정확히 연구·진단하지 못해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의 존재이유는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지식인들 중 시대변화에 잘 적응해 성공하는 사람도 있으나, 긴 안목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입장을 바꿔 상대 또는 상대국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정치인들은 단견적·현실적 측면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한국은 매우 복합적인 구조를 가진 데다 변화가 매우 빠른 사회"라면서 "이런 급변 때문에 세대별 언어적·문화적 단절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우리의 증조부, 조부는 한문으로, 일제시대에는 일본어로 소통했으나, 이들은 현재 세대와 이런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세대간 대화할 수 있는 공통된 언어조차 없다"면서 자신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대학에서는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의 연구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논문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언어가 달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으며, 2년에 한번쯤 '학문의 고향'인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