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의 흔적을 실견하기 어려웠던 시절, 고구려의 성곽은 언론 보도 또는 연구서의 도판에서나 간혹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계가 직접 조사한 임진강 연안의 강안평지성이나 아차산의 보루가 있지만 관계자와 일부 연구자들이나 살펴보았을 뿐, 잘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꽤나 아쉬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임진강의 고구려성 가운데 당포성이 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필자가 이 성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발굴조사를 막 끝내고 복토하기 전이어서, 성벽의 기초부까지 노출되어 있었다. 뒤에서 언급할 기둥구멍 역시 수직으로 단면을 드러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런 것이 있네 하고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대규모의 성곽도 아니지만 당포성은 고구려의 성곽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이다.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하여 이 성이 세워졌다는 점뿐만 아니라 성가퀴 뒤쪽으로 '기둥구멍(柱洞)'이라고 부르는 성벽 기초부까지 수직으로 뚫린 구멍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둥구멍은 중국 집안과 환인지역의 주요 고구려 산성에서 발견되어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으로 여겨져 왔다. 용도를 둘러싸고서는 방어용 무기의 거치대 혹은 성벽 축조와 관련 된 시설인지 논자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당포성, 고구려성을 이해하는 실마리
그러던 것이 당포성 조사를 통해, 4∼5세기에도 고구려 성벽에는 기둥구멍이 조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초기에서 중기의 시간적 변화와 관련된 시설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반면 당포성과 유사한 입지조건을 가진 호로고루성에서는 기둥구멍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임진강변의 고구려 성 가운데 유독 당포성의 성벽만이 기둥구멍을 필요로 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당포성은 고구려 성의 독특한 축조방식과 방어력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자료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당포성은 중국 길림성 동부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들의 연원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겨진다. 중국 길림성 동부의 연변지역에는 수십 기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은 발해의 발상지이자 중심 지역이었기에, 성곽 대부분의 축조시기를 발해시대로 보아왔다. 반면 고구려인이 세운 성곽은 매우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였다.
그런데 현지답사 결과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 두만강 북안에는 당포성과 유사한 입지조건을 가진 강안평지성을 찾을 수 있었다. 화산활동의 결과 만들어진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 아래를 흐르는 강을 활용한 성곽이다. 그 축조방식과 지리적 조건에서 임진강변의 당포성·호로고루·은대리성과 별다른 차이를 끄집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근에는 발해시기의 평지성도 남아 있어,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계승과 확장의 과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얼마 전 관련 문제를 다룬 글을 학계에 보고한 바 있지만, 고구려의 성곽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주제이다. 당포성과의 첫 대면이 남긴 씁쓸한 경험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 이것저것 살피고 또 정리하지만 돌아오고 나면 언제나 이해의 부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해가 갈수록 고구려 성곽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구려의 성곽은 국방상의 거점이면서 고구려의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연결지점이었고, 각 지역 간의 교통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산성에 올랐다가 돌무더기가 무너지면서 무릎을 다쳐 여전히 불편하다는 것도 이러한 관심과 무관하지는 않을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