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도쿄는 장마에 접어든 가운데, 월드컵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기로 뜨거운 초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후지 TV에서 '아이리스' 등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김치찌개 등 한국음식이 소개되는 등 '한류'는 여전히 일본 방송가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이다. 이런 가운데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NHK는 특집 다큐멘터리 "일본과 조선반도(한반도)"라는 5부작을 기획하여, 1910년 한일병합으로부터 100년간에 걸쳐 일본과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개하면서 한·일 관계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재조명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서 지난 4월 18일 "한일병합의 길: 이토오히로부미와 안중근"을 첫 방영하여, 러일전쟁이후 일본의 한국 병합과정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한반도 정책구상,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을 소개하였다. 5월 16일에 방영한 2회, "3·1 독립운동과 친일파"에서는 3·1운동의 배경과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미친 영향, 이광수와 최남선이 친일파로 변하는 과정 등을 소개했다. 이어 5월 20일에는 3회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황민화정책의 시대"를 주제로 중·일전쟁이후부터 태평양전쟁시기까지 지원병 또는 여자근로정신대의 형태 등으로 동원된 한국인들과 가미가제로 불리는 '특별특공대'로서 죽은 한국인 병사들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중 특히 한·일 양국에서 관심을 끈것은 되었던 "한일병합의 길: 이토오히로부미와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하게 다뤘다. 먼저 일제의 한국 병합에 이르는 과정을 서양 세력, 특히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본과 아시아의 안전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것으로 설명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동안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를, 이번 방송에서는 조선의 자치를 구상한 현실주의 정치가로 부각시켰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주목하는 일본
반면 고종을 비롯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헤이그 밀사 파견 등을 통해 저항했으나, 병합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위기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동양평화론'을 제창함으로써 10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인에게 독립정신과 평화에의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 방송과 언론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한국의 최근 관심과 추모 행사들이 반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표명하였다.
필자는 현재 도쿄에 체류하면서 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였고, 이와 관련 많은 일본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한 일본인 교수는 '동양평화론'이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면서도, 현재 한국에서 '동양평화론'을 다시 재조명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또 어느 일본 언론인은 '동양평화론'이 100년 전 손문과 같이 '아시아주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와 관련, 일부 일본 학자들은 최근의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논하면서 한·일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키며, 양국이 같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제사회와 지역문제 등에 같은 입장을 취할 여지가 많다고 언급하였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100년 전 한국에서 '동양평화론'을, 그것도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이 주창하였다는 내용의 이번 다큐멘터리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 구상은 한·일 관계를 풀어나가는데 하나의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우려할만한 점도 있다. 1회 방송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민에게 선의를 가졌으며, 주변 국가들과도 평화 정책을 추구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2회 "3·1운동과 친일파"에서도 사이토 총독이후 문화정치와 식민지 근대화를 추진하여 한국인들이 일제 지배에 협력하도록 태도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한일병합을 무리한 '결혼'에 비유하는 당시 조선주재 일본군 사령관의 일기 내용, 본국 정부에 식민지 조선의 자치를 건의하였다는 사이토 총독의 이야기 등을 언급함으로써, 일본에 조선을 위하는 정치가들이 있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이광수나 3·1 독립운동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 등 당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조선이 당장 독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반면 3·1운동 이후 해외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 등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사를 자세히 모르는 일본 시청자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친일'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면 지나친 것일까?
'선의'를 앞세우는 '의도'에서 느끼는 불편함
최근 일본 내 한국과 조선사 관련 학계의 연구 동향을 보면, 당시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 지원이나, 192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식민지 근대화의 측면에서 구체적 자료를 통해 접근하는 것들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한 일본의 연구자들의 면면은 이러한 일본 학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일본의 일부 지식인과 정치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며 반성하고 미래를 위해 한·일 양국이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 애쓰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 측의 선의를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 행동으로서 예를 들면, 한일병합 무효선언이나 일부 문화재의 반환 등을 촉구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 과거 역사적 사실의 직시 못지않게 일본과 중국 등 동북아 국가를 포용하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다. 나아가 좀 더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100년이 지난 현재 21세기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이는 2010년 8월의 뜨거운 여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서울과 도쿄에서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과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