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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외교 갈등과 잘못된 역사 인식
  • 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
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

통일신라 시대는 일본과의 교역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였다. 대부분의 교과서나 개설서에서는 이 시기의 대외관계를 당나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과의 관계도 매우 활발하였다.

한국과 일본 측의 역사서에 보이는 기록을 종합해 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00여 년 사이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39차례나 사신이 파견됐으며,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일본이 당나라로 보낸 소위 견당사(遣唐使)는 불과 10차례였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당시의 양국 관계가 얼마나 활발했던 것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신을 보낸 횟수에서 뿐 아니라 그 내용면에서도 매우 풍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698년 3월 신라에 온 일본의 사신은 효소왕을 왕궁인 숭례전에서 알현했으며, 703년 성덕왕에게 온 일본 사절단은 204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고 한다. 또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신 중에는 문장가로 알려진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과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당시의 사절단이 단순히 무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 교류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전래된 신라의 문물들이 일본의 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쇼소인(正倉院)에 남아 있는 신라의 화려한 유물들만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거니와, 당시 일본에 건너간 김암을 일본 천황이 영원히 일본에 머무르게 하려고 노력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인들의 신라 문화 수용에 대한 열의를 알 수 있다.

교역의 편의를 위해 조공을 사칭한 김태렴

당시 양국의 사신 교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752년 약 700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일본에 간 신라 사절단일 것이다. 당시 신라 사절단의 대표는 신라의 왕자인 김태렴(金泰廉)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해는 일본 나라에 있던 도다이지(東大寺)의 낙성식이 있던 해이다. 이 기회를 틈타 대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간 김태렴 일행은 아마도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교역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신라의 조공사인 듯 한 제스츄어를 취하게 된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752년(경덕왕 11) 윤 3월에 다자이후(규슈 지방의 지쿠젠노쿠니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기관)에서 보고하기를 "신라 왕자 대아찬 김태렴과 공조사(貢調使) 김훤,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 등 700여명이 일곱 척의 배를 타고 와서 정박하였다"고 하였고, 약 3개월 후인 6월 14일에는 "신라왕자 김태렴이 신라 국왕의 사명을 받들어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다"고 하였다. 이어 17일에 일본은 신라 사신일행에게 향연을 베풀고 "앞으로는 국왕이 친히 못 오면 반드시 표문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김태렴을 신라의 왕자라고 볼 만한 증거도 없다. 따라서 김태렴이 신라의 왕자를 사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는 일본이 이듬해인 753년 2월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으나, 신라에서는 일본국 사신의 태도가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추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본 동대사 대불전 안에 있는 불상일본 동대사 대불전 안에 있는 불상

이익을 위해 명분을 양보하지 말아야

당시 김태렴 일행의 교역을 전해주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당시 교역의 양상이 나와 있는데 향료와 약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일본에 팔았음을 알수 있다. 특히 사찰의 예불에 필요한 향약의 판매를 통해 상당한 실익을 챙긴 것으로 짐작된다.

혹자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이 사건을 김태렴이 당시 일본 정부를 속이고 실익을 취하기 위한 계획된 사기극이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위대한 상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후일 일본인들, 특히 일본 지배계층들의 한국 인식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 즉 신라를 일본의 조공국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잘못된 역사인식의 가장 중요한 연원은 이른바 신공황후의 신라 침략설에 근거한 임나일본부설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 연대에 대해서조차 2갑자(120년) 정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면 김태렴 사건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일본인들로 하여금 신라가 조공한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일본은 공문서에서 신라를 '번국'(蕃國: 일본의 조공국가)으로 표기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이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자 노력하였다. 753년 당나라의 현종을 알현한 일본 사신이 황제 앞에서 "신라는 일본의 번국"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데, 이러한 일본의 잘못된 신라 인식에는 김태렴의 사기극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735년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의 땅이 신라의 영유임을 인정하고 양국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자, 신라는 일본에 대해서 '왕성국(王城國)'이라며 신라의 우월적인 위치를 주장하게 된다. 이후 일본과 신라의 관계는 한층 소원해지게 되지만, 이렇게 잘못 형성된 일본의 신라에 대한 인식은 후대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에서도 일본의 우월의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100년 전 한국 강제병합 때에도 당시 일본 지배자들의 기억 속에서 이러한 인식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거울삼아 한 때의 실리를 위하여 후대에 두고두고 후회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하여야할 것이다. 즉 국제관계에서는 실익도 중요하지만, 명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이웃 나라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동북공정이나 독도의 영유권 등에 대해서도, 결코 실리를 앞세워 명분을 양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2012년부터 고등학생에게 가르칠 '동아시아사'의 교과서 편찬 시에도 이러한 점에 충분히 유의하여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에게 확고한 역사 인식을 심어 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