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10일 서울과 도쿄에서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은 1910년에 체결된 한일병합 조약은 사실상 불법 무효라고 선언한 것이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72) 도쿄대 명예교수와 함께 이 선언을 주도한 김영호 유한대 총장(70)을 만나 공동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과 추진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_ 편집자 주
한·일 양국의 지식인 214명이 발표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개인적으로 과거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해 안중근 의사 서거 100년을 맞이하여 논문을 발표하면서 2010년에는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에서 병합조약 원천무효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5년에 무라야마 담화가 있었는데 이제는 무라야마 담화를 능가하는 한일 순회 공동선언 혹은 일본 정부의 담화나 국회결의 등이 나오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18일 동경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만나 논의를 시작했다.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오랜 관심사였고, 한국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내가 "밥값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 문제는 거창한 생각이 아니라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한일 지식인 선언은 그동안 한국병탄조약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주류인 도덕적으로 책임질 부분은 있지만 조약은 유효하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조약 자체를 무효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한국병합 불성립론'을 수용한 최초의 양국 지식인 선언이다. 한·일 양국 학자들의 합의 도출까지의 과정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 각료들과 수상들 사이에서 일본의 한국병합이 "강제적인 것이었다", "제국주의적인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그 정점이 무라야마 담화였다. 무라야마 담화는 한국병합이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조선민족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부당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유효하다는 '부당유효설'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천무효'를 선언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참여한 일본 지식인들이 용기를 내주었기에 가능했다. 선언에 참여한 104명의 일본 지식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 특히 공동선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 학자들과 가장 논란이 되거나 합의가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제일 어려웠던 점은 '불의부당 무효론'(불의부당하니까 무효다)이었다. 불법 무효론은 학문적 쟁점사항이므로 불의부당까지는 정의감을 가지고 찬성의견을 끌어낼 수 있으나, 불법이라 하면 국제법적 문제에 해당되며, 또한 개념적인 엄밀성 때문에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법이란 말은 넣지 않고 불법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갖추려고 했다. 내용만 갖추면 불법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제3자가 보면 '불법이다'라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병은 조선인의 의사가 전혀 반영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조선측 참여자들에게는 대표성이 없었다는 내용으로 일본의 한국병합 절차에 많은 문제와 결점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결론을 원천무효(영어로 null and void)로 명확히 하였다. 즉 불법이란 용어 대신 "많은 문제가 있었다" 식으로 '많은' 이란 용어를 넣어 표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합의 이후에 '명백한 불법'이라는 용어를 넣지 않으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국제법에서 '많은'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 엑스포 심포지엄에 기조 발제자 참석을 포기하고 다시 도쿄로 가서 논의하여 '중대한'으로 수정 변경하고, 불법이란 말을 선언문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와다 하루키 교수와의 개인적인 친분이나 신뢰, 학문적 양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언은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한국과 달리 일본 언론은 냉담했다는데?
우선 일본과 한국의 언론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방한한 무라야마 수상을 만났는데 한일공동선언 보도자료를 보고 감동 받았다고 하며, 이를 적극 지지한다고 하더라. 어제 아침 중앙일보에도 무라야마 수상을 인터뷰 한 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타이틀이 "한일지식인 공동선언을 적극 지지한다"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일본의 경제학자들로부터도 선언에 참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일본의 잡지사로부터는 인터뷰 요청까지 받았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일본의 반응이 냉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 역시 일본 사회에 준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100년의 숙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양국은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고 보는데 어떤 계획이 있는가?
일본의 선언 참여자 수가 1천명이 되면 일본 신문에 광고를 내자고 하였다. 지금은 한·일 양국에서 각각 서명자 수를 500명씩 늘리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7월 하순에는 일본에서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이후에 한·일 양국의 대표가 일본과 한국정부를 찾아가서 선언문을 제출, 두 나라 수뇌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무효 공동선언을 발표할 것을 건의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인터넷으로 보고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전세계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동선언은 지식인들의 선언이라는 한계가 있는데?
이 문제는 관료들은 풀지 못한다. 정치인들 역시 표를 의식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 때문에 풀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문은 지식인이 열어야한다. 이전까지 한·일 두 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지식인들이 답을 제시하고 양국 정부에 압박을 가한 적은 없었다. 북경대학 교수들이 한·일 간의 지식인 형태로 중·일 문제도 합의를 도출하면 좋겠다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한일병합 무효 공동선언은 동북아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한·일 두 나라 지식인들이 창출한 새로운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병합 원천 무효'라는 이번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이 가지는 의미를 정리하자면?
조금 우회적인 답이 될 수 있는데 일본 동경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아사히신문에 "일본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고, 고래다. 일본의 사고방식이나 사고틀은 우물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우물 안 고래다"라는 칼럼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우물 안 고래"라는 말의 의미는 일본이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미래를 향해 나가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래는 바다로 가야한다. 일본이 우물이 아니라 바다의 고래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이 아시아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시아라는 친구를 얻지 못한다면 아시아는 중국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우물의 틀을 깨고 아시아라는 바다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문제 해결의 핵심이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원천무효다. 일본이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원천 무효를 인정할 때 일본과 한국, 일본과 아시아 간의 역사적 화해는 이루어질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제언을 한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아의 역사갈등 대응이라는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문제, 간도문제, 독도문제 등에 대해 중국, 일본, 러시아 관계국들의 연구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 공동선언서를 독립기념관이나 백범기념관에서 발표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공동선언은 자국민 중심주의를 넘어서 열린 국제주의, 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지 않았다. 이렇듯이 우리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위해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말고 안중근 의사의 철학을 이어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동북아역사재단이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