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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한ㆍ일 국제학술대회 1910년-그 이전 100년: 한국과 일본의 서양문명 수용
  • 손승철 강원대학교 교수

지난 6월 11일부터 2박 3일간, 한일문화교류기금과 동북아역사재단 공동주최로 한·일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1910년 한일합방, 그 이전 100년간 한·일 양국의 여러 상황을 비교하면서 양국이 각기 서양문명을 어떻게 수용했는가를 상호 비교하는 학술회의였다.

19세기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서세동점의 거센 흐름속에서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로 일찍 출범하였고, 한국은 근대화에 뒤져 일본제국의 희생물이 되었다.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은 양국 모두에게 피해를 주었고, 나아가 지금까지도 평화로운 아시아 질서,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1910년, 그 이전 100년간 한·일 양국의 시대와 서양문명에 대한 인식, 정치 경제체제의 개혁, 그리고 국민교육 등 5개의 주제를 상호 비교했다. 회의진행은 일본학자 5명, 한국학자 5명이 총 10개의 주제를 발표했고, 이에 대해 약정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의 19세기는, 당시 조선에서 흔히 사용되던 표현을 빌면, '숯불과 얼음'의 관계라고 부를 만한,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이 격렬하게 만났던 위기의 시대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 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으며,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신체가 있는 것과 같은"시대라고 했다.

당초 대다수의 조선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은 눈앞에서 전개되는 대외정세를 화이관념의 연장선상에서, 서양 오랑캐라는 새로운 위협적 요소의 '양적' 증가라는 일종의 '현상적'인 차원의 변화로만 해석하려했다. 그러나 조선 정계 '안'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치세력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개혁 개방의 움직임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여파로 강렬한 보수회귀의 분위기 속에서친중국 세력의 득세와 중국의 종주권 획책, 왕권에 대한 견제가 보다 강화되었다. 또한 이로 인한 정치적 구심축의 균열이 진행되면서 결국 사태는 동학 농민봉기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와 외세의 개입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외세간의 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끊임없는 엇박자로 사태가 전개되는 양상은 문명사적 전환기의 조선이 근대 국제질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급격하게 봉쇄하고 만다. 이러한 역사현상은 19세기 조선의 주요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시대인식이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정치적 엇박자로 이어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왼쪽부터 개회를 선언하는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상우 이사장, 축사를 하는 정재정 이사장, 일본의 존왕양이론에 대해 발표하는 키리하라 토호쿠大 교수1.개회를 선언하는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상우 이사장,
2. 축사를 하는 정재정 이사장,
3. 일본의 존왕양이론에 대해 발표하는 키리하라 토호쿠大 교수

전환기에 나타난 시대인식의 갈등과 조선 정치의 엇박자

근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帝國)'은 오늘날의 국제사회를 서술할 때에 독립국가의 영역을 넘어선, 즉 주권본연의 자세로서 이용되었던 'Empire'라는 의미와는 크게 다른 것이며, 일반적으로 독립주권국가를 의미하는 말로 이용되고 있었다. 즉 명치천황의 일본제국이나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이야말로,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독립국임을 명시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양국 모두 자국중심주의의 화이의식이나 일본우월주의 또는 위정척사사상을 넘어서서 냉정하고 정확한 세계인식에 근거해서 서양과 대면하려 했다는 지적은 매우 참신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국가 간의 대등성'을 너무 강조했다는 점은 현실과 괴리된 주장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일본은 현실적으로 열강과의 대등을 목표로 하면서도, 관념적으로는 일본의 우위를 유지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결국 조선침탈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하는 반론도 매우 흥미로웠다.

미래 100년을 위해 1910년 이전을 되돌아 보다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 사립학교 교육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도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양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 속에서 보완하는 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통감부가 주도한 학교교육과 사립학교 교육은 대결적인 측면도 있었고, 공통적이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교육 방식과 인식을 갖춘 사람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근대화와 자주화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 곧, 고등교육이 필요했다. 다만, 대학교육은 근대화와 자주화를 전면적으로 개시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교육은 대륙침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근대교육은 대립 구도 속에서 세계변동에 대한 잘못된 교육이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외도 여러 가지 논쟁점이 많았다. 결론적으로 최근의 학술회의들이 모두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에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이 학술회의는 그 이전 100년간의 한·일 양국을 비교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학술회의를 통해, 근대 한·일 양국이 서구문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했는지, 이를 바탕으로 두 나라가 각기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 갔는가를 상호 비교하는데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100년 전의 한·일 양국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향후 100년을 상생공영(相生共榮)하는 미래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보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