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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남경대학살 일본군의 40%가 한국인?
  • 남상구 연구위원(정책기획실)

Question:

인터넷에 남경대학살(1937.12~1938.2)을 자행한 일본군의 40%가 한국인이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요? 이것이 사실인가요?

Answer:

어떤 유언비어인가?

중국 웹 사이트에 "중국인이 잊지 말아야 할 역사, 남경대학살과 한국인" , "역사 진실 : 남경대학살 중 일본군보다 더 잔인했던 '한국인' " 등의 제목으로 남경대학살에 한국인이 대거 가담했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남경대학살을 자행한 일본군의 40%는 한국인으로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가 이끈 15사단 소속 '조선인 부대' 가 학살에 앞장섰으며 마쓰이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이러한 사실을 증언했다. 그리고 전쟁 종식 후 연합국의 전범재판에서 한국 출신 148명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그중 23명이 사형을 당했다" 는 등의 내용이다. 유언비어는 점차 부풀려져 중국 침략전쟁에 가담한 일본군 250만 명 중 한국 국적 사병이 160만 명이라든가 허위의 '남경대학살 참가 조선 군관 명단' 까지 등장하고 있다.

유언비어의 허구성

첫째, 한국인이 일본군으로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육군은 1938년, 해군은 1943년으로 지원병제도를 통해서였으며 징병제는 1944년에 와서였다. 육군 지원병제도에 의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동원된 한국인은 17,364명이고 일제 패전 시까지 동원된 전체 인원은 일본 정부 자료에 따르면 군인이 116,294명, 군속이 126,047명이다. 또, 일본 군부는 한국인에게 무기를 줄 경우 반란을 우려하여 한국인을 주력으로 한 부대를 편성하지 않고 일본인 부대에 분산 배치하는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다. 따라서 한국인이 40%를 점하는 부대나 한국인 3만 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남경대학살(1937.12~1938.2)을 자행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둘째, 극동국제군사재판이나 남경 전범재판에서 한국인이 남경대학살과 관련하여 전범으로 판정을 받은 사례는 없다.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은 한국인은 148명인데, 이들 중 대다수는 1942년 8월 이후 강제로 동원되어 동남아시아에서 근무한 포로감시원(129명)이고 그 외에 통역 16명, 군인 3명이 있다. 이 군인도 중국과는 관계없는 필리핀 방면에서 근무했다. 한국인 포로감시원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 대법원도 인정한 바 있다(1999.12.20).

셋째, 사이트의 글은 구체적인 자료와 인명 등을 제시하여 역사적 사실인 듯 위장하고 있으나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이다. 마쓰이이와네가 이끈 15사단 중 한국인 부대가 남경대학살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마쓰이는 남경대학살 당시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이었고 당시에는 15사단이 없었다.(15사단은 1905년 창설된 후 1925년 폐지되었다가 1938년 4월 재편)' 남경대학살 참가 조선 군관명단'이라는 것도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남경대학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남경대학살에 한국이 대거 가담했다는 유언비어는 남경대학살 허구론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과 일맥상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날조로 중국 네티즌의 혐한정서를 부추겨 한중 우호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