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중국 최남단의 서남부 지역의 한 오지에는 우리의 고대왕국 '백제(百濟)' 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한 농촌 마을이 있다. 중국 고대사에서는 이 지역을 안남(安南)으로 호칭한다. 옛날(BC 3세기경)에는 진시황이 이 땅에 중국 최초의 관서인 상군(象郡, 오늘의 광서 숭좌시)을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광서(廣西)지역 지도에는 「광서 옹녕현 백제향 백제허(邕寧縣百濟鄕百濟墟)」 라는 행정구역이 나오는데, 그곳은 광서 자치구의 수도인 남녕(南寧)시와 최남단 지역의 항구도시 흠주(欽州)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 「광서 장족자치구 옹녕현 백제향」 의 중심지는 '백제허' 라는 조그마한 농촌마을인데, 그 지명은 문자 그대로 백제성터 또는 백제유적지를 뜻하는 곳이다. 지명인 백제허가 말하는 것과 같이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옛 백제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백제향' '( 향' 은 우리의 면단위에 해당)은 오늘의 중·월 국경지대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인구는 약 3만3천여 명이다. 주민 대다수는 이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옛 장족(壯族)들(낙월, 서구로 호칭됨)의 자손으로 그들은 월족(越族)의 일족이기도 하다.(한 주민의 말에 의하면, 자신들의 조상은 오래전에 오늘의 산동반도에서 왔다고 한다.)
옛적부터 이곳의 지명은 '백제허' 로 일관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옛날에 '백제군' 과 같은 백제 '치소(治所)' 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 관한 지명 사전에 의하면 '백제허' 에 대한 표준어 발음은 '빠이지허(Baijixu)' 라고 하는데 이곳 장족들의 발음은 전혀 다르게 '대백제 Daejbakcae'라는 우리말 발음을 한다. (한편 백제향에는 '나루허((那..墟)' 가 있는데 장족들은 이것도 표준어와 다르게 대나루(Daeijnazlaeu)라고 발음한다.)
옛 '대백제' 는 분명 이 땅에 왔던 것이다. ' 대백제' 가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발음은 있을 수 없다.(백제는 지금의 일본 오오사카 지역에도 '백제군' 이라는 치소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그 나라를 부를 때 그저 '구다라' 라고 한다. 이것은 이곳 장족들의 '대백제' 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광서 장족자치구에 남아 있는 '대백제' 의 흔적
중국 남조의 정사인 『양서(梁書)』 나 『송서(宋書)』 는 백제는 진말(晋末·400년 전후)에 중국 강남지역의 진평군(晋平郡)에 진출해 거기에 '백제군' 을 설치했다고 한다.(이무렵 백제는 '요서군' 에도 '백제군' 을 설치했다) 그런데 『송서』 는 백제가 설치한 '치소' 는 '진평현(晋平縣)' 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안남지역인 지금의 '백제향' 지역을 말하는 기관이다. 이 땅의 장족들은 아직도 그 나라를 '대백제(Daejbakcae)'라고 발음을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백제 치소는 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은 '대백제' 가 이곳에 와서 이 지역을 경영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이 지역은 어느 지역이며, 백제인은 이곳까지 올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230년대의 왜국(倭國)의 사정을 소상히 적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에 의하면 흑치국은 나국(裸國)(벌거벗은 사람의 나라)과 접해 있다고 하는데, 이 나국(옛 부남(扶南))은 오늘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과 캄보디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흑치국' 은 안남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왜인전』 은 주유국(朱儒國, 난쟁이의 나라)은 왜지(倭地)에서 4,000여리 떨어져 있고, 나국과 흑치국은 거기서도 동남으로 6,000~7,000여리나 멀리 있어"선행 1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한국 학계의 일부에서는 '나국' 은 대만으로, 흑치국은 비율빈으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의문점은 1989년 세상에 공개된 백제인 '흑치상지' 장군의 묘비명에 의해 모두 해소되었다. 본국 백제는 660년 당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으며, 그 나라의 왕(의자왕)과 대소신하들은 모두 당나라에 끌려갔다. 한 사서는 그 수가 1만2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흑치상지장군(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은 당나라 조정을 위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689년 향년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고 낙양 망산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때 장군의 자제 흑치준(黑齒俊)은 아버지 의 묘비를 남겼는데, 이것으로서 우리는 잊어버린 백제의 고토를 찾게 되었다.
흑지상지 장군의 출자를 전하는 묘비명
이 묘비에는 자신들은 월래 부여(扶余)씨의 왕족이며, 백제사람인데, 증조부 문대(文大)는 백제 달솔(達??)로 흑치국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가계는 달솔부터 3대에 걸쳐 이 땅에서 봉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씨도 '흑치' 씨가 되었다고 그 사연을 적었다.(중원의 봉건제도는 황제는 '자제종친' 을 자신의 후국에 후왕(候王)으로 봉하게 되는데, 『예기..記』 에 따르면 이때 그 후왕은 자신이 봉해진 땅의 나라이름을 자신의 성씨로 한다고 했다.)
『당서』 와 『삼국사기』 열전에는 흑치상지장군의 출자를 '백제 서부인(百濟西部人)' 이라 해 사람들은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고대사 해석자 중에는 그가 '백제 서부인' 이라고 하니까, 이를 간단하게 백제의 도읍지인 사비(泗批) 지역의 서쪽으로 보고, 그의 출자는 오늘의 예산이나 당진지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나라 조정에서는 백제가 한때 안남(安南) 지역에 진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지역은 백제 본국에서 바다건너 서부지역(대륙)에 있으며 『( 당서』 동이전 백제조,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요…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그곳 출신을 '백제서부인' 이라고 호칭 한 것이다. 『( 원화성찬(元和姓纂)』 권10은 「黑齒: 百濟西郡人也」 라고 바로 기록하고 있다.)
최근 발간된 한 사전 『( 중국 장수전(中國將帥傳)』 , 1997)에 의하면, 흑치상지 장군은 오늘의 '광서 백제향' 지역에서 출자한 것으로(黑齒常之(?-689年), 唐高宗李治, 武則天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西北) 西部人) 기록 하고 있어, 그간의 의문점은 해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서 볼 때 오늘의 광서 '백제허' 지역은 옛 '백제군' 의 도읍지였으며 동시에 그곳은 '흑치국' 의 한 도읍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