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근대 국제 질서, 근대 외교, 근대 국가 주권 등 현재 국제 질서의 모태로 칭송받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지 37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이후 서구는 대외 무역의 확대와 식민지 개척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베스트팔렌조약 체제를 실현했는데 여기서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는 국가 경제의 규모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됐으며, 둘째는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대외 전쟁이 국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베스트팔렌 체제가 펼친 국제 질서의 경로는 18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패권 장악이다. 이 시기 전 지구적 팽창을 주도한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일부 열강 대상의 제국 연구가 서구 학계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이에서 찾을 수 있다. 대체로 이들 연구에서 도출된 제국 형성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 경제적 팽창과 군사적 팽창 간 균형, 대외적으로 해당 지역의 역학 관계에서 주변 경쟁국과의 경제·군사·기술 분야의 우위 확보, 대내적 균형과 대외적 우위를 조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치력이다. 상기 세 요소 모두 전 지구적 규모의 경쟁과 팽창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경쟁과 팽창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 바로 근대 국제 질서의 조건이자 현실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당시 동북아 지역은 어떠했을까? 현재 구미 지역 중등교육과정 역사부도나 사회과 교육의 세계사․세계 문명 관련 지도를 보면 16~17세기 중원과 한반도는 같은 색으로 표시되거나, 한반도의 경우 제후국에 해당하는 Vassal state로 설명된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여진, 몽골 등 북방계 세력의 경우 강력한 무력으로 중국을 뒤흔들지만 결국 중원 지배 이후 중국․한족에 동화돼 중국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식의 서술이 일반적이다. 조선, 여진, 몽골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존 페어뱅크 이래 고착화된 중국 중심의 사대외교 틀 속에서 동북아 나아가 동아시아 세력 관계를 설명하려는 병폐에서 기인한다. 중국과 비중국, 더 구체적으로 한족계 왕조와 그 주변의 이웃이라는 이분법에서 이 시기 동북아 지역 질서를 바라보기에 이 지역에서의 갈등과 분쟁은 중국의 외교술에 침묵 당하고 주권과 국가는 중국 중심적 질서에 묻히고 있다. 일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국·중화·한족 중심의 동아시아 전통 질서’와 상응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식은 최근 중국 학계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역사적 근거 마련을 위해서 동아시아의 과거를 현재의 중국에 끼워 맞추는 중화제국론과 궤를 같이한다. 환언하면 베스트팔렌 체제를 동 시기 동북아 정세에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동서(東西) 간 비교하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의 오류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시기 동북아 지역 질서에 대한 몰이해가 중국중심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동북아 지역 질서는 서구의 그것과 여러 측면에서 달랐다. 필자는 그 다름의 기본 토대의 하나로 동북아에서 보이는 국가의 역사성과 국가 간 상호작용의 중층성을 짚고 싶다. 여진은 분열 속에서도 자신들의 활로를 찾고자 명과 조선의 강온 정책에 맞서 똑같이 양면 전술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안보를 담보하고자 노력했다. 명과 조선으로부터의 수직(受職)을 자신들의 내부 질서에서 주요한 정치적 권위로 활용했고 무역권 확보를 통해 경제력을 증가시켰다. 특히 여진은 조선과 명의 국방·국경 정책이 이전과 같이 작동하지 못한 17세기 초반, 후금을 건국하고 마침내 중원에서 통합왕조 청을 세웠다. 명은 15~16세기에 걸친 약 200여 년간 전쟁, 외교, 무역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몽골과 여진의 팽창을 억제하고 아골타, 칭기즈칸 시대와 같은 북방계 왕조의 통합을 불발시켰다. 원에 버금가는 전일적 위계질서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고자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수단들을 동원했고 군사적으로도 요동을 포함한 북부 변경 지역에서 거점 확보 및 내지화 전략으로 국방 안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은 사대만 외쳤을까? 명과 국경을 맞대면서 요동을 포함한 만주 지역 관련 안보 사안을 구체적으로 다루었기에 표면적 평화 관계에도 불구하고 대 여진 정책은 갈등과 긴장의 연속을 겪었다. 동시에 여진이 지나치게 명의 지배권 하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했고, 명과의 협력을 원칙으로 여진에 대한 강공법을 구사하는 한편 국경 주변의 일부 여진 세력을 자국 중심의 지역 질서와 주체적 문명(교화)론의 하위 단위로 포섭하는 등 여타 방법들도 동원했다.
17세기 중엽 서구에서 만들어지는 또는 만들어야 하는 근대적 국가 체계와는 달리 동북아에서는 수세기 전부터 일국 단위의 정치체 수립과 국가 경영의 전통이 존재했고 대외 관계, 즉 외치(外治)는 내치(內治)와 구조적으로 연계됐다. 특히 중앙 정부의 국경, 지방, 영토,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대내·외 치국책은 자국 안보, 즉 국가 생존의 근간을 이루었다. 다시 말하자면 대외 안보와 국내 안보의 총체로서의 국가 생존에 주목할 때 동북아 세력 관계를 이끌어간 개별 역사 주체들의 시선과 논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국가 권력 전체를 장악한 왕과 중앙 정부가 민생 복지를 포함하는 사회경제정책의 시행과 더불어 문치(文治) 우위의 국정 운영을 추진하면서 중앙 집권의 통치 시스템 구축에 주력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통치 전략은 안보를 담보로 사회 구성체들의 동의를 끌어내야 합리화될 수 있었고 따라서 안보는 국가 권력이 행사되고 유지되는 과정에서 물질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모두 포괄하는 지배 담론의 핵심 기제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합법적 행사는 대내적으로 볼 때 전 사회적으로 관철됐고 대외적으로 볼 때 대명 정책과 대여진 정책을 포함한 군사 외교 정책에서 국가 주권의 수호로 적용됐다.
이러한 국가 생존의 측면에서 볼 때 체계적인 국경관리시스템 구축은 국정의 영원한 현안이자 과제였다. 중앙 정부는 국경 문제에서의 우위 확보 내지는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 명 사신에 대한 의전(儀典)과 내조(來朝) 여진에 대한 수용은 외교의 중추였고 다양한 루트의 정보 수집 활동 또한 국가 권력이 주도했다. 명 중심의 외교 질서와 상충되지 않으면서 국지적 단계의 조선 헤게모니를 대 여진 관계에서 관철코자 노력한 사실도 명과 여진을 상대로 세력 균형을 취하기 위한 국가 생존 전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대, 책봉-조공,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전통질서로만 정의할 수 없는 조선, 여진·후금·청, 명 사이에 그리고 개별 정치체 내부에 존재한 긴장, 분쟁, 조율, 견제-균형 등을 심찰하는 작업은 조선과 명, 조선과 여진·후금·청, 명과 여진·후금, 명과 몽골, 여진·후금·청과 몽골 등 다자 간 상호작용 속 동북아 국제 질서의 역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개별 정치체의 대외 정책이 국제적 층위에 설정된 외치(外治)와 국내적 층위에 설정된 내치(內治) 간 교차 속에서 구현됐음을 파헤칠 수 있는 연구가 이어진다면 16~17세기 동북아 지역 질서에 대한 심화 이해와 더불어 탈중국중심주의의 역사관을 진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가, 주권과 관련해서 이다-아니다 내지는 있다-없다 등 소모적 해석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 구조적으로 동 시기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권역에서 전개된 지역 질서와 비교할 수 있는 연구의 확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