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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폴란드-러시아 공동 역사 교과서의 사례
  • 대담 김종학 (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폴란드-러시아 공동 역사 교과서의 사례


미로스와프 필리포비츠

Miroslaw Filipowicz

폴란드 중동부유럽연구소 소장


폴란드에서 손에 꼽히는 역사학자로, 루블린 가톨릭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 및 교수를 역임하였다. 2013년 중동부유럽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여 중동부 유럽의 역사와 현 정세에 집중하는 한편 러시아 및 폴란드 관계사 연구도 함께 진행 중이다.

2016년에는 폴란드 외무장관 직속의 폴란드-러시아 간 역사적 난제 해결을 위한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측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Między Wschodem i Zachodem」, 「Emigranci i jankesi. O amerykańskich historykach Rosji」 외 다수가 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19세기 이전부터 이어져 온 장기간의 역사 분쟁, 제2차 세계대전,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상호 적대적이었던 두 국가가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넘어 역사 화해를 이뤄냈다. 동북아가 전쟁과 폭력이 지배한 과거를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각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폴란드 역사학자 필리포비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폴란드는 갈등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특히 공동 역사 연구 및 공동 교과서 집필과 관련하여 러시아와의 역사 화해를 위해 어떠한 협력 활동을 전개해 왔는지 알아보고 동북아 역사 화해를 촉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Q

필리포비츠 소장님과 중동부유럽연구소(Institute of East-Central Europe)에 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중동부유럽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저명한 폴란드 역사학자 중 하나인 예르지 크워초프스키(Jerzy Kłoczowski) 교수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회의 성격이었지만 2001년부터 연구소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연구소는 폴란드 외교부에 소속돼 있으며, 중동부 유럽의 역사와 현재 정세를 주로 다루면서 동시에 러시아 및 폴란드-러시아 관계사 연구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연구소는 국가 간 대화 프로젝트(international dialogue projects)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2013년 소장으로 취임한 이래 연구소가 어떠한 정치적 분쟁이나 분열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폴란드의 특정 정당이 아니라, 폴란드를 위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에는 폴란드 외무장관 직속의 ‘폴란드-러시아 간 난제 해결을 위한 TF 전권위원’에 임명되었으며, 이 TF의 폴란드 측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제 전공은 사학사와 역사 이론 연구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역사가 사회와 민족 간 분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며, 또 상호 이해에 이르는 과정에도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Q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과 중동부유럽연구소가비교사적 관점에서 본 임시정부, 공화주의, 역사화해: 한국과 폴란드라는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이번 학술대회는 두 기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앞선 두 차례의 회의도 한국과 폴란드 양국 학자들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었으며,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폴란드와 한국, 두 나라의 역사에서 지나치게 많은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상대하기 어려운 이웃 나라와 공통의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 두 나라가 공유하는 특징입니다. 한국은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이는 비단 우리가 한국의 동료 연구자들과 공통의 언어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많은 친구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함께해야 할 연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양 세계대전 사이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한국과 중동부유럽에 치유되지 않은 상흔을 남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가장 어려운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Q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폴란드 역사는 아직 생소합니다. 폴란드 망명정부 수립의 역사적 배경과 활동, 그리고 망명정부에 대한 국제적 인정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A

폴란드 망명정부는 1939년 9월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으로부터 공격당한 직후 수립되었습니다. 망명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문제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 굳건한 의지 덕분에 폴란드 국가는 국내외에서 폴란드 지하국가(Polish Underground State)의 형태로 법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폴란드 지하국가는 국내에서는 “국내군”, 서유럽에서는 “폴란드 서부군”의 형태로 자체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망명정부와 국내의 지하정부에까지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1945년 이후 망명정부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실추됐지만, 폴란드 망명자들의 위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르지 기에드로이츠(Jerzy Giedroyc)가 파리에서 출간한 “문화(Kultura)”라는 월간지와 연계된 인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폴란드 국내·외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폴란드 망명자 집단이 폴란드 외교정책, 특히 동유럽 지역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폴란드-러시아 공동 역사 교과서의 사례Q

폴란드는 미국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헌법을 채택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과 의의에 대해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A

1791년 5월 3일의 헌법 제정은 폴란드 자긍심의 원천 중 하나입니다. 이 헌법은 이후 100년 넘게 유럽 지도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인 국가에서 채택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 정치 체제가 가진 몇 가지 결함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개혁을 실행에 옮기기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가 몰락한 뒤에도 5월 3일 헌법의 이상은 소멸하기는커녕 면면히 지속됐습니다. 오늘날 이 헌법은 병든 나라를 치유하려고 했던, 진실로 현실참여적이고 결의에 찬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지적 노력이 구현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옛 폴란드 공화국(Rzeczpospolita, 제츠포스폴리타)은 공화주의적 군주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군주정이었습니다. ‘Rzeczpospolita’라는 국명도 ‘republic’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Q

2018년은 폴란드가 독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 열릴 것 같은데, 주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A

현대 폴란드는 정치적, 이념적으로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적대적인 두 개의 다른 사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줍니다. 따라서 독립 100주년은 모든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기념식을 통해 현재의 분열 양상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벤트입니다. 독립의 관념과 전통은 우리를 단결시킬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폴란드 독립의 설계자였던 요세프 피우수츠키(Józef Piłsudski)와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 그리고 빈첸티 비토스(Wincenty Witos) 또한 단일한 정치적, 이념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에는 이들 모두의 기념물이 있으며, 이 세 사람은 각각 대단히 높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립국가 수립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협력을 향한 노력은 애국심의 완벽한 표본이라는 사실입니다.


Q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 화해와 관련하여 중동부유럽연구소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국가 간 역사 분쟁의 본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공동 역사 연구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A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작업을 가까스로 해냈습니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역사가와 역사교사들은 몇 권 분량의 교육용 보조 자료를 함께 준비했습니다. 우리의 주목적은 상호 공감을 고취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공감은 상대방 관점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어렵게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이 프로젝트의 러시아 측 감독관들이 이미 저자들 사이에 합의된 내용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간섭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폴란드 측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재정 자금을 지원하되 우리의 지적 자율성을 보장해주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 측 감독관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러시아 저자들이 우리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역사가들에게는 공동의 기반을 찾을 능력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폴란드-러시아 공동 역사 교과서의 사례


Q

역사 이론가로서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역사 분쟁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A

제 직업적 양심상 이 문제에 대한 사견은 상당히 절제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전문가 역할을 할 만큼 동북아시아 역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일본과 고통스러운 과거사에 관해 대화를 시작할 필요성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일본인들도 이에 대해 충분한 이해심과 배려심을 갖고 화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입니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우리 중동부유럽 지역보다 역사 문제로 인해 훨씬 더 분열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항상 ‘정직한 역사가들은 논의의 상대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 대화의 결과가 서로의 이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Q

폴란드와 한국 간의 학술 교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동북아역사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A

저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의지와 지적 잠재력에 대해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재단의 재정 운용도 정말 부럽습니다. 한국은 지식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유럽 중심적 관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재단이 국제학계의 역사 논쟁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주요 역사학 학술지에서 한국 역사가의 논문을 거의 본 일이 없습니다. 일본 학자들의 존재감이 더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가 그 자신만의 애국주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폴란드와 한국 간의 학문적 협력에 관하여 말씀드리면, 저는 두 나라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동북아역사재단과 우리 중동부유럽연구소의 협력이 이미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한국 전문가들이 우리 연구소와 러시아 학자 간의 공동 작업에 국제 참관인으로 참여해줄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것은 한국에도 매우 유익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