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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
역사포커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던 신규식은 여운형을 비롯한 청년들과 논의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한국 독립을 요구할 것과 한국 독립을 선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라 안팎으로 소식을 전하며 봉기를 촉구한 이들의 노력은 독립선언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2월 1일,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김규식이 프랑스를 향해 상하이를 떠나면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3·1독립운동의 막은 올랐고, 국내의 <선언서>와 만주 지린에서 나온 〈대한독립선언서〉 등도 모두 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천명하였다. 3·1독립선언이 가진 역사적 의의는 크다. 첫째, 제국주의 침략을 되받아치는 세계 식민지 해방 투쟁의 선두에 한국이 나섰다는 사실이다. 침략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 전 민족이 일어나 독립을 요구하고 나선 투쟁은 식민지가 된 다른 민족과 국가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3·1운동 소식을 크게 보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
남·북한, 중국, 일본의 고조선사 연구를 분석한 책 고조선사 연구 동향
재단 새 책 남·북한, 중국, 일본의 고조선사 연구를 분석한 책 고조선사 연구 동향 『고조선사 연구 동향: 2000년 이후 국가별 쟁점과 전망』은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국내 학계와 북한 및 중국·일본에서 발표된 고조선 관련 연구물을 검토하여 성과와 문제점을 짚어보고 향후 학계가 풀어야 할 과제를 전망한 책이다. 고조선은 역사상 첫 국가이자 오늘날 우리 민족사의 원류로, 고조선사 연구는 우리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꽤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특히 전통시대 학자들은 각종 문집에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남겼는데 『삼국유사』나 『동국통감』 등은 평양을 중심으로 고조선을 이해했고, 『동국통감제강』은 현재의 중국 요서와 요동을 아우른 국가로 이해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고조선의 위치를 정확히 하기 위해 관련 전적(典籍)을 꼼꼼히 읽어보고 고고학 자료들을 하나라도 더 수집하려고 열심이다. 중국과 일본의 고조선 연구는 자국의 역사를 보완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중국 학계는 상(商) 말 3인의 성현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기자와 고조선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리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록, 기자가 조선에 와서 8조를 가르쳤다는 『후한서』 동이열전 등의 기록을 그대로 신빙하여 고조선이 기자조선에서 시작하여 연인(燕人)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에서 끝났다고 보았다. 중국에게 고조선은 고대 중국인이 세운 중국 고대의 지방 정권으로 해석되었다
박선미 (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기고 16~17세기 동북아 정세에서 뒤집어 본 베스트팔렌 체제 2018년은 근대 국제 질서, 근대 외교, 근대 국가 주권 등 현재 국제 질서의 모태로 칭송받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지 37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이후 서구는 대외 무역의 확대와 식민지 개척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베스트팔렌조약 체제를 실현했는데 여기서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는 국가 경제의 규모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됐으며, 둘째는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대외 전쟁이 국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베스트팔렌 체제가 펼친 국제 질서의 경로는 18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패권 장악이다. 이 시기 전 지구적 팽창을 주도한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일부 열강 대상의 제국 연구가 서구 학계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이에서 찾을 수 있다. 대체로 이들 연구에서 도출된 제국 형성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 경제적 팽창과 군사적 팽창 간 균형, 대외적으로 해당 지역의 역학 관계에서 주변 경쟁국과의 경제·군사·기술 분야의 우위 확보, 대내적 균형과 대외적 우위를 조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치력이다. 상기 세 요소 모두 전 지구적 규모의 경쟁과 팽창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경쟁과 팽창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 바로 근대 국제 질서의 조건이자 현실로 발전했다.
이정일 (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조선시대의 일본통 신숙주와 「해동제국기」
조선통신사 이야기 조선시대의 일본통 신숙주와 「해동제국기」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통신사 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일본통’ 외교의 승부사가 남긴 발자취 조선 초기의 정치가 신숙주(申叔舟,1417~1475)라 하면 ‘숙주나물’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후에 세조로 즉위한 수양대군 편에 가담했으며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빨리 상하는 숙주나물의 특성이 신숙주가 변절한 모습과 유사하다는 이유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있다 보니, 역사 인물 신숙주에게는 ‘배신과 변절의 아이콘’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신숙주는 1439년(세종2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했다.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무려 6명의 임금을 섬겼다. 이 정도 경력만으로도 그가 정치적으로 탁월한 처세가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정치 무대에서 보여준 화려한 행보 이면에, 외교가로서 조선의 대외 관계에 남긴 족적과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443년에는 조선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선발되어 일본 교토에 다녀왔고, 1452년에는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의 서장관으로 명조의 수도 북경에 다녀왔으며, 1460년에는 강원·함길도 도체찰사로서 모련위 야인(毛憐衛野人·만주 여진족)을 토벌했다. 그는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시문에도 뛰어나 오랫동안 예조판서를 역임하며 외교와 문교(文敎)를 관장했다. 조선의 대일본 통교 규정은 세종 때 만들어져 세조 때 완비되었는데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신숙주는 그것을 한층 보충하고 정비했다. 1443년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는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대마도에 들러서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계해약조’를 체결하기도 했다.
윤유숙 (재단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