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11.11.)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전 유럽은 전쟁 중이었으며 미국의 참전(1917.4.2.)을 계기로 대전이 종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대통령은 미국의 중립을 견지함으로써 재선(1916)에 성공했으나,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결정함으로써 평화의 대통령에서 전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J.Washington)이 프랑스 혁명기 영·프전쟁에 미국의 중립을 선포(1793)한 이래 124년간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중립 정책의 포기를 의미했다. 약 900만 명에 달하는 제1차 대전 희생자 가운데 116,516명의 미군이 포함된 것도 이같은 윌슨의 참전 결정 때문이었다. 자유와 안전을 증진시키겠다는 윌슨의 독트린은 이후 100년간 미국의 대외 정책을 규정함으로써 오늘날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윌슨 독트린은 미국 의회 연설(1918.1.8.)에서 발표된 14개조(Fourteen Points)에 담겨져 있다. 이 14개조는 윌슨의 비선조직인 ‘조사단(The Inquiry)’이 대통령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제5조에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14개조는 이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정부의 협상 지침이 되었다.
‘조사단’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전후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원칙이었다.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터키제국은 다민족 국가였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제국의 지배를 받던 소수 민족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킴으로써 제국의 균열과 해체의 신호탄이 될
수 있었다. 윌슨 대통령의 친구이자 ‘조사단’을 이끌던 하우스(E.M.House) 대령이 김규식(金奎植,1881~1950)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그의 보좌관 본잘(Stephen Bonsal)을 통해 “한국 문제는 강화회의에서 다룰
문제가 아님”을 통보토록 한 것도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한정할 것임을 의미했다. 요컨대 윌슨 대통령의 전후 처리 구상에는 한국 문제는 없었다.
그럼 조사단이란 어떤 조직이었는가? 윌슨 대통령은 참전을 결정한 5개월 뒤, 전후 처리와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한 정책 자문단을 꾸리고자 하였다. 1917년 9월 초, 국무부와는 별도의 비밀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대학 총장 출신이던 윌슨은 관료들보다는 학자들을 더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의 대학들은 미국과 유럽을 벗어난 세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슬라브, 아시아, 아프리카를 전공하는 역사가와 전문가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고 숫자도 적었다. ‘조사단’은 16개 분과, 126명의 스태프로 구성되었다. 극동 분과의 수장은 1918년 8월부터 34살의 위스콘신 대학 정치학 교수 스탠리 혼벡(S.Hornbeck)이 맡았으나, 극동에 대한 그의 지식은 일천했다. 그 결과 ‘조사단’은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전후 구상을 구현할 청사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 문제, 특히 산동(山東) 반도의 독일 이권과 조차권을 중국 혹은 일본에 반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윌슨은 결국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과 타협했다. 국제연맹 불참이라는 배수진을 친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4월 22일 4국 수뇌회의(Big Four:미·영·프·이)에서는 산동반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윌슨은 만일 일본이 국제연맹에 불참한다면, 그들은 극동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말 것으로 판단했다.
1919년 4월의 세계는 파리에서 발신한 산동 문제를 둘러싼 미·일 간의 타협 소식에 의해 윌슨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미 국무부는 주일미국대사에게 3·1운동 이후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가이드 라인을 다음과 같이 통보(1919.4.14.)했다. “미국이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고, 일본 당국으로 하여금 미국 정부가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에 동정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신한청년단 대표이자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김규식은 한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8월 21일
파리에서 미국에 도착한 그는 2개월간 미국에 머물면서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재건해야
할 당위성을 홍보할 계획임을 밝혔다. 아울러 3·1운동 당시
자행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미국 선교사들의 보고서들이 모두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김규식의 이같은
계획은 그가 대한제국 정부의 국비 유학생으로 1897년 도미하여, 로아녹대학에서 6년간 수학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미국 유학은 부친
김용원(金鏞元)의 러시아 미션과 관련 있었는데, 그는
1885년 2월 초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 연해주를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나 고종의 대러 접근책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을 속방화하려는 이홍장의 정책과 충돌함으로써 김용원은 러시아를
넘나들었다는 이유로 3년간(1885~1888) 귀양가야만
했다. 따라서 김규식의 미국 유학은 부친이 겪은 고초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컸다. 유학 시절 김규식이 의친왕 이강(李堈)뿐만 아니라 이범진의 장남
이기종(李璣鍾)과 동문수학하며 맺은 교우 관계는 이후 해외 무대에서의 항일독립운동에 자산이 되었다.
뉴욕타임즈(1919.8.23.)는 김규식의 미국 도착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던 독립 청원서 가운데 일본 대륙정책의 목표에 관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본은 우선 중국의 인력과 자원에 대한 지배를 통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며, 이는 오직 대륙의 교두보인 한국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다음 목표는 태평양의 패권 장악인데, 이를 통해 호주의 비옥한 토지와 미국의 태평양 연안으로 일본 이민자들의 이주를 촉진시키고자 한다.”
미국의 재앙은 태평양에서 비롯될 것이고 그 시발점이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미국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김규식의 통찰에 대해 미국 정부가 주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