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3·1독립선언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던 신규식은 여운형을 비롯한 청년들과 논의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한국 독립을 요구할 것과 한국 독립을 선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라 안팎으로 소식을 전하며 봉기를 촉구한 이들의 노력은 독립선언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2월 1일,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김규식이 프랑스를 향해 상하이를 떠나면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3·1독립운동의 막은 올랐고, 국내의 <선언서>와 만주 지린에서 나온 〈대한독립선언서〉 등도 모두 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천명하였다.
3·1독립선언이 가진 역사적 의의는 크다. 첫째, 제국주의 침략을 되받아치는 세계 식민지 해방 투쟁의 선두에 한국이 나섰다는 사실이다. 침략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 전 민족이 일어나 독립을 요구하고 나선 투쟁은 식민지가 된 다른 민족과 국가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3·1운동 소식을 크게 보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둘째, 3·1운동은 ‘민중’이 주체로 떠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으려고 나선 사실은 역사적 주체의 교체와 발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사의 주인이자 역사를 움직여나가는 주체인 민중이 등장하고 정립되어가던 계기와 시기가 바로 3·1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셋째, 3·1운동은 역사적 정통성의 소재를 확인시켜주었다. 3·1운동은 민이 바라고 지향한 것이 ‘왜놈 나라’가 아닌 독립된 ‘한국’이자 ‘조선’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이를 실현시키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 곧 독립운동가요, 겨레가 나라를 잃은 시기에 항일 투쟁에 나선 인물만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앞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1917)>에서 정리되었다.
근대국가 대한민국 건설
나라 안팎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은 모두 한국(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그러니 다음 과제는 독립국가를 세우고 이를 운영할 정부와 의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라 안팎 곳곳에서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마침내 1919년 4월 10일에서 이튿날까지 국가와 정부 조직을 논의하는 모임을 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국가를 세우고, 이를 운영해 나갈 임시정부(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을 만들었다. 또 연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제헌헌법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이를 담았다.
大韓民國 臨時憲章
제1조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함
제2조 大韓民國은 臨時政府가 臨時議政院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중략)
제10조 臨時政府는 國土 恢復後 만 1개년 내에 國會를 소집함.
大韓民國元年 4월 일
제1조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제국(帝國)이 아니라 민국(民國)임을 말해준다. 1910년 ‘대한제국’으로 망했지만, 9년이 지나 되살려 세운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한국사 최초의 민주공화국, 곧 국민이 주인 되는 시민사회요 근대국가를 세운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독립운동으로 근대국가를 이룩한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제2조는 정부와 의회 조직의 관계를 명시하여 공화정 운영 체계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제10조는 의회를 임시의정원이란 이름으로 운영하다가, 국토를 되찾으면 1년 안에 ‘국회’를 소집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광복 이전에는 대한민국을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으로 운영하지만, 광복이 되면 ‘정부’와 ‘국회’로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에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근대국가를 세우고, 정부와 의회 조직을 갖추어 독립운동을 펼친 귀한 사례를 남겼다. 그래서 ‘독립운동 근대국가 건설론’, ‘독립운동 근대화론’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룩한 근대사회를, 한국은 독립운동 역사를 통해 이룩해냈다. 그래서 3·1운동을 곧 시민혁명이라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은 1919년 연호(年號)를 ‘대한민국’이라 썼다. 대한제국이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융희로 끝을 맺었는데, 9년 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국가는 연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국(民國)이라 줄여 썼다. 이것이 1919년 이후 줄곧 사용되고, 1948년 9월 1일에 발간된 <대한민국 관보> 제1호에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시기 대한민국의 체제는 1948년 정식 정부 시기 대한민국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의 다양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외교와 독립전쟁, 국내·외 행정 장악 등 세 가지 활동에 중심축을 두었다. 국가와 정부를 수립한 계기가 종전과 파리강화회의였으므로 외교 활동에 집중한 것은 당연했다. 터 잡고 있던 중국을 비롯하여, 미국·영국·러시아 등이 주된 외교대상국이었다. 다음으로 임시정부는 군사력 양성과 독립전쟁에 무게를 두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맞춰 법령을 만들고, 국내에 비밀군사조직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설치하며, 육군무관학교에서 장교를 양성하고, 대한광복군총영 등 직할 부대를 조직하거나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처럼 기존 부대를 정부 소속으로 편제시키고,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비행사 양성소를 두어 비행대 편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내·외 행정을 직접 장악하려는 목표를 내걸고 임시정부는 나라 안팎에 촘촘한 연결망을 구축하였다. 1920년 초에 임시정부와 연결된 국내 비밀 조직체가 100개를 넘은 사실이나, 연통제와 교통국의 하부 조직이 국내에 조밀하게 들어선 점은 임시정부의 총체적인 방략이 성과를 올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항일 투쟁은 독립전쟁으로 나아갔다. 1919년 서간도에서 한족회(민정부)와 서로군정서(군정부)가 세워지고, 대한독립단이 출범하였다. 북간도에서는 간민회(墾民會)가 대한국민회로 성장하고,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어 독립군을 길러냈다. 3·1운동 후 편성되고 정비된 독립 군단은 모두 50개를 넘었다. 재만 독립 군단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는데, 1920년만 헤아려도 1,700건을 넘는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공격했지만, 독립군은 이를 되받아쳐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냈다. 독립군에 처참하게 패한 일본군은 앙갚음에 나섰다. 1920년 10월 초 일본군이 간도를 침공하여 독립군의 토대인 한인 사회를 짓밟고 나섰으니, 경신참변(庚申慘變)이 그것이다. 이에 독립군들은 대거 북상하여 1921년 초 러시아 이만에 이르렀으나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북로군정서와 일부 독립 군단은 북만주로 돌아왔고, 러시아 자유시(알렉세프스크)에 도착한 병력은 소속과 편제 문제로 갈등을 벌이다가 ‘자유시 참변’이란 참극을 맞았다. 그래서 일부는 러시아에 남고, 나머지는 병력을 수습하여 북만 지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3·1운동을 겪으면서 민중이 항일 투쟁의 주체로 자리를 잡아갔다. 또 사회주의가 국내로 들어와 대중들과 결합하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농민·노동·학생·청년·여성운동 등 분야별 대중운동이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농민운동의 축은 소작 투쟁이었다. 농민의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떨어졌고, 이들의 생계 투쟁은 점차 민족 문제의 본질과 이어지면서 소작 투쟁으로 나아갔다. 노동운동도 3·1운동 이후에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노동쟁의 형태로 빠르게 퍼져갔다. 1920년대 들어 노동운동 단체들이 속속 조직되었다. 1921년 부산부두노동자총파업은 노동쟁의와 함께 민족문제를 들고 나간 대규모 노동운동이자 항일 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늠하는 기원이기도 했다. 학생운동은 3·1운동을 통해 대중 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생운동은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에서 핵심 구실을 톡톡히 해냈고, 그만큼 민족운동에 기대와 기여도가 높아졌다.
베르사유 체제의 고착과 독립운동의 장기화 모색
파리강화회의 이후 독립운동계는 국제 사회에 새로운 변수에 눈길을 돌렸으니, 워싱턴회의와 극동민족대회가 그것이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워싱턴회의에 참여를 시도했고,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결성하여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태평양회의 주제는 태평양 해군력을 제한하는 것일 뿐이고, 이승만의 의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달리 극동민족대회는 러시아가 세력 팽창을 목표로 삼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9개국 대표를 모아 열렸다. 여기에서 한국 문제는 노동 계급이 성숙하지 않은 단계이니 민족주의와 손잡고 민족운동을 일으킬 것,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이를 개량하고 촉진할 것 등으로 정리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만들어진 베르사유 체제는 한국의 독립운동이 길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 체제는 수립 초기 임시정부가 주력을 기울이던 외교 활동에 넘기 힘든 걸림돌이 되었다. 여기에다 국내 행정을 원격 장악하려던 연통제와 교통국, 군사 조직이던 군사주비단이란 삼각 틀은 일제의 철저한 탐색과 추적으로 조각났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난국을 헤쳐 나가던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후임으로 박은식을 뽑은 뒤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하면서 새 길을 찾았다. 정부 주변에서도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찾는 독립전쟁 준비론이 대두하였다.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상촌 건립 운동, 만주·몽골 접경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 시도, 의열단 주역의 황포군관학교 입교 등이 거기에 속한다.
만주에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흩어진 진영을 재정비하고 나섰다. 북만 지역 독립군단들은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으로, 남만 지역에서는 같은 무렵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만주에서 정의부·참의부·신민부가 탄생하고, 행정·입법·사법기관을 갖춘 준정부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군대를 운영하였다.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가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대부분 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학생운동 단체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였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농민운동은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거쳐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을 출범시켜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운동을 펼 수 있는 바탕을 갖추었다. 노동운동은 ‘신사회 건설’과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걸고, 파업투쟁을 벌여 경제권익투쟁만이 아니라 반제 독립투쟁으로 발전하여 갔다. 학생운동도 계몽 수준을 벗어나 사회주의를 지향하였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조선공산당과 함께 6·10만세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 분화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좌우합작, 통일전선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1926년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조선공산당이 학생계와 천도교 세력과 좌우합작을 이루어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국민대표회의1923를 주도했던 안창호가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출범시켰다. 이는 오로지 한 개 정당을 만들어 국가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쳐나가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출발이었고, 이것이 중국 본토와 만주로 확산되어 1920년대 후반을 장식했다. 또 국내에서도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되고 일본 곳곳에도 지회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좌우합작운동은 한국만이 아니라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독립운동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한국만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에 신음하던 모든 국가와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강화회의에 거는 기대는 컸고, 거기에 맞춰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기본 틀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강화되는 바람에 또 다른 전쟁을 기다리며 기나긴 준비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다시 다가올 전쟁을 내다보며 준비하고 노력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총체적이고도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