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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이야기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통신사
  •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통신사 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통신사

 

140여 년 만의 ‘통신사’

통신사는 대등한 나라 사이의외교관계를 상징한다. 조선은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쇼군將軍에게통신사를 파견한 있었다. 그러나 1443이래 통신사왕래는 끊기고말았다. 그리고일본의 오랜센고쿠시대戰國時代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해 종결되었다.

1587,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지역 제패를 눈앞에 두었다. 규슈 지역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그에게 결국 굴복하였다. 이제 일본에서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은 오다와라小田原 호조北条 가문 정도였다.

한편 규슈에진입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쓰시마의영주인 가문으로부터도 항복을받았다. 히데요시는쓰시마가 주선하여조선 국왕으로하여금 일본에와서 자신에게항복의 예를바치게 하라는명령을 내렸다.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통신사‘새 국왕 즉위 축하’와 ‘조선의 항복’ 사이

조선 국왕과막부 쇼군의관계는 단절된 오래였다. 그러나 다시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대등한형식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국왕이와서 항복하라니, 조선이 요구를 들어줄리는 없었다. 이를 알고 있던쓰시마는 그의요구를 그대로전하지 않고, 일본에 새로운왕이 즉위했으니축하 사절을보내달라는 말로바꾸어 조선을설득하고자 했다.

조선은 일본의갑작스러운 통신사요청에 당황했다. 게다가 접촉해온이는
이전에 관계를맺었던 무로마치막부의 쇼군도아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왕위’를찬탈했다는 소문도돌고 있었다. 조선은 우선 요청을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쓰시마는이대로 포기할 없었다. 2 후인 1589, 이번에는쓰시마의 영주인 요시토시宗義智직접 조선에건너와 교섭에임했고, 이전에조선의 해안을약탈하였던 조선인해적 두목과잡혀간 조선사람들을 송환한다는조건으로 통신사파견에 동의해주었다. 통신사를 이끄는 사신에는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선발되었다. 통신사는 1590 3, 한양을 출발하였다.

 

히데요시를 만난 조선 사신

1590 7 일본의수도인 교토에도착한 통신사는 동안이나 조선국왕의 국서를전달하지 못하고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만나지못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남아있던 저항세력인 호조가문을 공격하기위해 오다와라에 있던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호조 가문으로부터항복을 받은후에야 교토로돌아왔다. 통신사는 11월이 되어겨우 국서를전달할 있었다.

통신사는 자리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다. 통신사는 조선인 중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절이었다. 통신사는 이때의 감상을 남겼는데, 먼저 히데요시의 용모는 왜소하고 추하며 얼굴빛이 검고 피부가 주름져 마치 원숭이 같았으나, 눈동자가 번쩍이며 사람을 쏘아보았다고 한다. 접견례는 통신사에게 매우 생소하였다. 연회 음식은 단출하여 접시와 옹기 사발에 담은 탁주가 전부였다. 술을 나누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의례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접견 자리에 자신의 아기를 안고 나와 조선 악공들의 연주를 감상하였는데, 아기가 옷에 오줌을 누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시녀에게 아기를 넘겼다고 한다. 통신사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외교 의례를 무시하는 듯한 이러한 행동을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글자로 표현했다.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통신사사행단의 보고와 전쟁의 위협

조선 국왕이‘일본 국왕’에게보낸 국서를전달한 , 통신사는 귀환길에올랐다. 조선국왕의 국서에대한 ‘일본국왕’의 답서는통신사가 교토를떠날 때까지도전달되지 않았다. 통신사는 며칠 오사카에서국서를 전달받았는데, 내용은매우 놀라웠다.

‘조선 국왕전하殿下’라고 해야하는 것을낮추어 ‘합하閤下(혹은각하閣下)’라고하고, ‘예폐禮幣’라고해야 하는부분을 조공품이라는의미를 담은‘방물方物’이라고 하는, 조선을 단계아래로 보는단어를 사용하고있었다. 내용은더욱 충격적이었다. 조선의 투항을기정사실로 하고, 앞으로 명나라를침략하고자 하니조선이 합류하라는요구를 하고있었다. 히데요시는통신사를 ‘조선의항복’으로 제멋대로받아들였던 것이다.

통신사는 수정을요구했고 논의 끝에비교적 온건한내용의 수정된국서를 받아귀국하였다. 그러나통신사는 원래의내용을 알고 있었다. 1591 2부산에 도착한통신사는 즉시한양으로 가서보고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전쟁을 계획하고있다는 정황은명백했다. 정사황윤길을 비롯한통신사 일행은대부분 전쟁이일어날 것이라며흥분했으나, 김성일만은그에 반대하면서‘히데요시의 눈은쥐와 같아두려워할 만한이가 아닙니다’라고하였다. 후일유성룡이 김성일에게전쟁 위기론에반대한 이유를묻자 그는‘나 역시어찌 왜적이오지 않으리라고장담할 있겠소. 다만모두가 놀라고현혹될까 우려되어이를 풀어주려하였던 것일뿐이오’라고 답했다. 김성일은 교토에서 시에서, 화려한 저택이늘어서고 백성들의집도 가득하며물자도 풍부하나, 전쟁을 그치지않으니 전쟁이란불과 같아서그치지 않으면자신도 타고 것이라며경계한 바가있었다. 조선이‘좋은 뉴스’인김성일의 말만곧이곧대로 믿고안심하고 있었던것은 결코아니었다. 조선은방어 태세를갖추기 위해노력했고, 명나라에일본의 상황을보고하기도 했다. 전쟁의 불씨가타오르고 있다는사실은 모두인지하고 있었다. 관건은 언제어디서 침략이시작되느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