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1917~1945의 ‘서시序詩’는 아마도한국인이 가장많이 애송하는시일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고결한 삶과민족혼이 깃든주옥같은 시는각박한 삶을살아가고 있는우리에게 상당한카타르시스와 영혼의안식을 제공하기도한다.
그런데‘민족시인’ 윤동주가살고 있던시기에 그와비슷한 삶을살다가 같은‘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옥고를치르고, 젊은나이에 요절한일본의 반전反戰시인이 있다고하면 여러분은깜짝 놀랄지도모른다.
그는바로 마키무라코우槇村浩, 1912.6~1938.9다. 일각에서는 ‘마키무라히로시’로 부르기도하는데, 본명은요시다 토요미치吉田豊道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이름났다. 올해 6월 1일은그가 일본서남부의 고치시高知市에서태어난 지꼭 106년이되는 날이다. 그는 옥고의후유증으로 1938년 9월, 26세의젊은 나이로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올해는그의 서거 80주년이다.
마치윤동주의 시원고를 친구인정병욱이 전남광양에 있던자신의 집에묻어두었다가 일제패망 이후다시 찾았듯이,
마키무라의 원고역시 일본군국주의가 발호하고있던 1930년대에는일본에서 출판되지못했다. 출판사주인이 기름종이에싸서 땅에묻어두었다가 그가죽은 지
25년만인 1963년에야세상에 내놓았던것이다. 그리고 1년뒤인 1964년
10월 『간도빨치산의 노래
- 槇村浩 시집』신일본출판사, 1964이최초로 간행되었다.
그가남긴 시는모두 26편으로알려졌지만, 그의생전에 발표된것은 대표작‘간도 빨치산의노래’ 등 6편에 지나지않았다. 그의첫 작품은「살아있는 총가銃架」이다.
그는만 20세때에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를『프롤레타리아문학プロレタリア文學』 1932년 4월임시 증간호에발표하였다. 이시는 모두 12연 183행에달하는 방대한서사시이다. 그러나그는 이시 발표직후 고치시일본 경찰에체포되어 고치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치렀다. 이시의 주요내용을 보기로하자.
“전략 오오, 3월 1일 / 민족의 피가가슴을 치는우리의 그누가 / 무한한증오를 한순간에내동이친 우리들의그 누가 / 1919년 3월 1일을 잊을쏘냐! / 그날 / 「대한독립만세!」소리는 방방곡곡을뒤흔들고 / 짓밟힌일장기 대신 / 모국의 깃발이집집마다 휘날렸다 / 가슴에 다가오는뜨거운 눈물로나는 그날을생각한다! / 반항의우렁찬 소리는고향 마을까지울려 퍼지고 / 자유의 노래는함경의 봉우리마다메아리쳤다. 중략
우리들은함경도 사내와여자 / 착취자에대한 반항으로역사를 새로쓰는 내고향의 이름에맹세코 / 온조선 땅에봉화를 올렸던몇 차례봉기에 피를흘린 이고향의 흙에맹세코 / 고개를숙이고 순순히진지를 적에게넘겨줄 수있단 말인가중략
바람이여, 분노의 울림을 담아 백두에서 쏟아져 오라! / 파도여,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 올려 두만강에서 용솟음쳐라 / 오오, 일장기를 휘날리는 강도들아 / 부모와 누나와 동지들의 피를 땅에 뿌리고 / 고국에서 나를 쫓아내고 / 지금 칼劍을 차고 간도間島로 몰려오는 일본의 병비兵匪: 병사 비적떼여! / 오오, 너희들 앞에 우리가 다시 굴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 거냐 / 뻔뻔스런 강도들을 대우하는 법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거냐 후략”
‒『間島パルチザンの歌 - 槇村浩 詩集』(東京: 新日本出版社, 1982), 38~50쪽.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간도중국 연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던 젊은 청년 일본인이 이런 시를 썼다.
그를연구한 전문가미야자키 키요시宮崎淸는마키무라의 시가일본에서 사랑받고높이 평가받는이유는 ①청춘의 모든것을 쏟아서시인 자신의혁명운동에 대한정열과 체험을, 무엇보다도 그마음의 진실로표현하여 객관화한점, ②당시 일본인들이부딪히고 있던전쟁, 억압등 냉엄한현실과 그역사적인 명운命運을전위前衛의 입장에서분명히 형상화하여보여주었던 것에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필자가 보기에위의 시는무엇보다도 일본인인마키무라가 마치한국인인 것처럼너무나 생생하고투철한 혼연일체의몰입과 동일시, 철저한 역사의식을보여주고 있다는점이 매우놀랍다. 이시를 읽는누구나 작자가한국인이라고 생각할것이다. 1931년 9월 일본이중국 동북만주침략 이후승승장구하던 시기에어떻게 이처럼우리의 독립운동과항일무장투쟁에 대한깊은 감동과동참을 토로할수 있단말인가! 그만큼그는 한국인들의독립운동과 반일투쟁에깊이 공감하고국제적 연대를갈망했던 것으로보인다. 마키무라는일본 당국의전향 요구를거부하고, 출옥후 끝내도사土佐의 한정신병원에서 불우하게일생을 끝마치고말았다.
감옥에있던 마키무라는조선 출신으로일본 도쿄東京에서활동한 좌익작가이자 운동가인김용제金龍濟, 1909~1994의‘조풍潮風’, ‘사랑하는 동지에게’, ‘성장한다는 것’, 이 세편의 시를자신의 노트에필사해 놓았다. 알려진 바로마키무라는 충북음성 출신의김용제와 교류했다고한다. 그런데일본인 학자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에따르면 김용제는일본에서 맹렬한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과좌익 활동을전개하다가 1937년 7월 조선으로돌아온 뒤에는변절, 전향하여오히려 맹렬한친일 분자로일본 군국주의앞잡이로 활동했다고한다. 마키무라의초지일관한 행적과너무나 대조적이라하지 않을수 없다. 마키무라는 옥중에서지은 장시‘바이런·하이네’1936. 1의말미에 ‘불강신不降身, 몸을 굽히지 않고, 불욕지不辱志, 뜻을 손상하지 않는다’라고 써서 자신의 불굴의 의지를 표현했다.
한·일양국 사이에는독도나 일본군‘위안부’, 교과서문제 등으로갈등이 깊어지기도한다. 그러나시인 마키무라의삶과 ‘간도빨치산의 노래’라는시와 시집은한·일 양국국민, 혹은민중의 진실한연대와 공명을시사하고 있다는점에서 깊은관심이 필요하다고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