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는 ‘2018 남북 평화 협력 기원 평양 공연 - 봄이 온다’라는 타이틀로 한국 예술단의 공연이 있었다. 2002년 이후 거의 16년 만에 이루어진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문화 예술을 매개로 남북한 사이에 상호 이해와 공감, 교류와 협력, 평화의 토대가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올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4월 말에 남북 정상회담이 구체화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한 유명한 외국 가수가 떠올랐다. 바로 등려군鄧麗君,1953~1995이다.
등려군은 대만 출신 가수로 우리에게는 홍콩 영화 ‘첨밀밀’에 삽입된 영화 음악 ‘첨밀밀甛蜜蜜, 달콤해요’,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요’, ‘야래향夜來香,달맞이꽃’ 등의 히트곡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슈퍼스타였다. 그는 주로 1980년대와 90년대 초 대만은 물론 중국, 홍콩,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화교華僑 사회, 일본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다.
1986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그녀를 세계 7대 가수이자 세계 10대 여성 가수로 선정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인 2009년에는 관영 뉴스 매체 차이나닷컴中國網이 ‘신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인물’ 1위로 등려군을 선정했다.
그녀는 노래를 통해 아시아와 세계를 연결하고 하나로 묶어주는 ‘영원한 가희歌姬’,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고 있다. 일본의 한 작곡가는 그녀를 ‘천사’라고까지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가수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복잡한 현대사와 국제관계의 차원에서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등려군은 생존 시에도 몇 번이나 사망설에 휩싸였고, 사망 후에는 암살설과 함께 대만의 스파이비밀첩보원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일생이 단순한 가수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곡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녀가 대만과 중국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스스로 정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출생과 아시아에서의 활동, 그리고 프랑스 이주 등에는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 중국과 대만의 대립, 중국의 개혁개방과 1989년 6·4 천안문 사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 아시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배경으로 활동하였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특출난 가수였다. 등려군이라는 이름은 예명이며, 본명은 등려균鄧麗筠이다. 그는 중국 본토 하북성河北省 대명현大名縣 출신의 아버지鄧樞와 산동성 출신의 어머니趙素桂 사이에서 1953년 1월 대만 운림현雲林縣에서 태어났다. 대륙 출신의 대만 이민 2세대인 셈이다. 대만에서는 이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불렀다.
중국 당국은 그의 노래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중국인들은 그의 노래를 계속해서 몰래 들었다. 당시 불법 복제 테이프가 무려 2억 개나 유포되었고, 시진핑 주석도 젊은 시절에 등려군의 노래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낮에는 등소평鄧小平의 말을 듣고, 밤에는 등려군의 노래를 듣는다’, ‘낮에는 나이 든 등씨가 지배하지만, 밤에는 젊은 등씨의 천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86년 중국 당국은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여러 차례 그를 중국으로 초청하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중국 대륙을 밟지 못했다. 특히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난 ‘천안문天安門사태’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89년 4월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호요방胡耀邦 사망 이후 베이징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홍콩 시민들은 이를 적극 지지, 성원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7일 홍콩에서는 베이징 학생 민주화운동 후원 집회가 열렸다. 처음에 등려군은 참가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이에 합류하였다. 화장도 하지 않고 ‘민주 만세’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반대군관反對軍管’,․‘아애민주我愛民主’라고 쓴 문구를 앞뒤에 걸고 집회에 참가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발표하고 노래를 열창했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집은 산의 저편에 있다家在山的那一邊’였다. 그는 “친구여 한때의 안락苟安을 탐하지 마라, 되도록 빨리 돌아와 민주의 불꽃을 태우자”라고 노래했다. 30만에 달하는 군중 역시 열렬히 호응했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앞에서는 중국군 탱크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등려군은 중국에서 노래하기를 단념하고, 이 해에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슬픈 자유’, ‘홍콩’ 등의 곡을 만들었다.
그녀가 부른 한국 가요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일본어’가 유일하다. 그녀는 1995년 초 요양차 태국으로 갔다가, 5월 8일 칭마이의 한 호텔에서 갑작스러운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비록 4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그의 노래는 세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나 이미지, 노래가 아니라 정직, 용기, 봉사, 겸손과 같은 진실한 마음과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새로운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등려군의 노래가 대만과 중국의 수많은 중국인의 마음을 녹이고 두 나라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했듯이, 그동안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에도 문화를 매개로 해빙解氷과 자유의 물결이 흘러넘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