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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일제 강제동원으로 앞서 떠난 이들을 기리며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일제 강제동원으로 앞서 떠난 이들을 기리며

 

근대 일본제국은 끝없는 침략과 전쟁을 이어갔다. 일제 말기로 접어들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제는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 기지가 되었다.

19384월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국가총동원법은 자신들의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 및 점령지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할 수 있게 하는 전시통제 기본법이다. 일제는 이 법을 모법母法으로 국민징용령1939, 조선인징병제1943, 여자정신근로령1944, 학도근로령1944, 국민근로동원령1945 등의 관계 법령을 제정·공포하여 조선인들을 끌고갔다. 만약 동원 명령에 불복 또는 기피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엔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북쪽의 사할린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까지 일제가 침략해 들어간 거의 모든 지역에 4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군인·군속으로 동원되었다. 일본의 탄광·광산·토건공사장·군수공장에 끌려가 가혹한 환경에서 혹사당한 조선인은 7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여자정신근로령공포 후에는 12~40세의 여성 수십만 명을 근로정신대로 편성하여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했고, 일부는 일본군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했다. 일제의 인력 동원은 인류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충격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였다.

필자는 1990년대 초반부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과 함께 강제동원 피해의 상처를 치유하고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그때만 해도 강제동원 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가 많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우리 유족들에게 강제동원 현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강제동원의 역사를 증언할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유족들도 사망, 노환으로 증언이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에 아버지와 형제를 빼앗기고 눈물겨운 삶을 살아온 사연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대가 끊길까 봐 죽지 못했다고 말하던 유족, 아버지의 생사를 처음 확인한 문서 한 장을 들고 오열하던 유족, 아무리 자료를 조사해도 기록이 없어 실망하던 유족, 피해 기록이 없어 피해 보상 소송에 참여하지 못해 마음 아파하던 유족, 힘겹게 살아온 삶의 고통이 몇 마디 말로 설명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유족들은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다. 그만큼 유족들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며 진상규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와 분단의 질곡을 겪은 우리들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8,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 지 80년이 되었다. 강제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족을 찾고 다시 한번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 본다. 유족들의 진술을 들으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가슴 먹먹해진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밖에 없는 그저 평범한 아들이자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잃은 것은 유족들의 탓이 아닌데도, 우리는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빼앗겨야 했다. 가난과 죽음을 곁에 두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마저 빼앗긴 채 바보처럼 살아야 했다.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 정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돈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맞바꿨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우리가 과연 무슨 보상을 받은 것인지, 오히려 우리가 당당히 주장해야 할 권리마저 빼앗긴 것이 아닌지 되묻게 된다. 청구권 자금으로 경제는 발전했다지만 이렇게 힘들게 버텨온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외면당하고 방치되고 있다. 유족들에게 일제하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지난해 6,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목소리를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강제동원되어 희생당한 피해자의 동원 경위, 노동 실태, 당시 상황, 유족의 삶과 사연 등이 담긴 증언집을 제작했다. 23명 유족의 증언을 담았다. 아버지, 남편, 오빠가 강제동원된 후 가족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차분히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시작된 고달픈 삶, 여성이기 때문에, 며느리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면서도 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온 유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문제를 외면해온 한국 사회를 향해 유족들이 풀어놓는 첫 보고서다. 이를 통해 일제가 남긴 식민 지배의 유산과 상처가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님을, 또한 현재 한일 관계의 원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에 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보상이 끝났다는 무책임한 말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반성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정부 또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근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유족들의 문제는 외면받고 있고, 유족들의 삶을 또 다른 독립적인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 양국 정부가 가족의 피해를 외면하는 동안 유족들은 모두가 잊어버린 한 마디 소식을 듣기 위해, 그저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 모를 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가해 기업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가 멋대로 합사한 아버지의 이름을 빼내기 위해 십수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 정부와 기업이 가진 피해자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유족들에게 우편저금, 후생연금 기록은 단순한 피해 자료가 아니라 유품이다. 한국 정부가 가지고있는 기록을 분류하고 분석해서 일본 측에 당당히 제시할 수 있는 강제동원의 증거 자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이어져야 한다. 이를 토대로 소송, 피해자 지원 등의 업무가 이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희생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한 사업도 시작되어야 한다. 먼바다와 낯선 하늘 아래 잠든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고 진상을 밝히는 것이 문명국가의 역할 아니겠는가. 국제법상 전쟁 범죄, 반인륜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 피해자와 유족이 사망하고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더 잊히기 전에, ·일 양국 정부가 속히 문제 해결에 나서기를 촉구한다.

식민 지배로 인해 겪은 어린 시절 슬픔과 고통을 보상받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노력에 정부가 힘써준다면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긴 세월 한 맺힌 슬픔을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사는 흐려졌으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지 피해자로서만 있지 않았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쳐 분단의 긴 터널을 지나온 수많은 피해자의 삶을 축약하지만, 백발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며 지금도 한·일 양국의 국회와 법원을 오가고 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뺴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공동 기획하여 발간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되어 희생당한 피해자의 유족 23인의 삶과 사연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완전한 해방은 일제강점기가 남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강제동원으로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통해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의 책임, 그리고 이 문제를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성찰을 촉구한다.









최낙훈

최낙훈

1940년 서울 출생, 1942년 후쿠오카 가이지마 탄광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최천호의 아들



아버지와 헤어진 지 72년 만에 난생처음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는 그 순간에 어머니 생각이 아른거렸다. 스물일곱 나이에 삼 형제를 키우며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본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을 탔느냐하며 울던 불쌍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뒤에는 가끔 TV에서 강제동원 이야기가 나오면 네 아버지 유골이라도 한 번 봐야 되지 않겠냐하시던 게 눈에 선하다.


신명옥

신명옥

1946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44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안징성에서 전사한 박헌태의 며느리



(돌아가시기)이틀 전이었을 게다. “엄마, 누가 가장 보고 싶어?”하고 물으니 시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 “엄마, 아들 보고 싶어? 손주들 보고 싶어?”, “”. “엄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얘기해, 누가 보고 싶어?”, “영감, 영감이 보고 싶다.” ‘영감이라니, 내가 시집 와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단어였다. 시어머니는 일제 말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빼앗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오셨던 게다.





정태랑

정태랑

1941년 경북 선산 출생, 1941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정봉규의 아들



해방되고 조선 사람은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탈 수가 없잖아요? 여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가 보였거든, 저기 보이는 섬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위령제가 열린 장소는 조선 사람들이 배를 타지 못해 자살을 많이 한 곳이란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가운데 일본 여성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고, 나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시키지 않았다.




남양강

남양강

1943년 일본 고베 출생, 1943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었다가 행방불명된 김외준의 며느리



고향에 오지 못하고 막막한 사할린 생활을 이어가던 징용자들은 거기서 재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분들도 생겼지만 우리 시아버지는 오매불망 고향에 돌아올 귀환 소식만 기다리고 홀로 사셨다고 한다. 얼마나 가족들에게 돌아오고 싶었을까. 가족들은 또 얼마나 시아버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까.





권수정

권수청

1938년 경북 상주 출생, 1944년 오키나와에 징용되었다가 희생된 권운선의 아들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제를 시작했다. “아버지, 오늘은 아들의 술을 받고 슬픔과 고통, 억울함을 잊으시기 바랍니다.” 인사를 드리고 한국에서 가져간 술을 올린 뒤 위령비를 아버지 무덤 삼아 주변에 술을 조금씩 부었다. 이어 동행한 벗들도 절을 올렸다. 위령비 옆에 피어 있던 히비스커스에 나비가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잘 찾아왔구나. 고맙다.”

아버지의 전령사였을까. 나비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김문식김문식

1949년 경북 문경 출생, 1942년 나가사키 탄광으로 징용되었던 김정옥의 아들



나는 알고 싶었다. 아버지가 왜 스무 살에 탄광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건강한 날이 없이 살다가 돌아가셨는지, 왜 내 동생들은 장애로 그토록 고생하며 살아야만 하는지, 우리 가족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린 역사를, 그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다.





이명구

이명구

1938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팔라우 섬에서 사망한 이낙호의 아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홉 살,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고, 병들어 시름시름 앓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형으로서 어린 동생을 잘 돌봐주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마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제사상에 차려진 과일이 먹고 싶다고 울던 어린 동생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영주

남영주

1939년 경남 의령 출생, 1942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뉴기니에서 전사한 남대현의 여동생



오빠! 오빠! 영주가 왔습니다! 오빠 보고 싶어서 영주가 왔습니다!” 추도사를 읽으려 했지만 더 이상 목이 메어 읽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끌려와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죽었을까, 불쌍한 오빠를 생각하며 한없이 눈물이 흘렸다. 술을 따라주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오빠에게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