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식민지 시기 재일 한인의 역사’를 주제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구술사Oral History를 시작했고, 1999년부터 기록학Archival Science 분야도 공부했다. 그간 단행본 12권(단독)과 논문 40여 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간 조사과장으로 일했다. 현재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에서 일제 말기 조선인 인력 동원을 연구 중이며, 역사 콘텐츠를 통한 역사 대중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과 함께 펼친 ‘역사문화콘텐츠 공간’이라는 난장亂場에서 즐기고 있다.
Q
연구위원님께서는 지난 11년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강제동원 증거 발굴, 피해자 조사 및 지원,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책임 추적 등 전방위적 활동을 펼치신 것으로 압니다. 위원회 활동 종료 후에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요?
정혜경
‘역사’가 그동안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일반 대중의 역사 인식 수준을 높이고 친숙한 형태로 알려 나가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특히 요새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남긴 유적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여 역사 대중화에 이바지할 것인가, 역사 보존에 관심을 가진 지자체나 개인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 중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역사에 흥미를 갖고, 역사를 객관적이고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국 8천여 곳에 산재한 강제동원 역사 현장의 문화 콘텐츠 구축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4월에 출간한 「우리 지역의 아시아태평양전쟁 유적 활용 - 방안과 사례」를 활용하고자 합니다.
Q
“대일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일제에 의한 피해를 입증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 데요, 일제 식민 지배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혜경
전후 역사 청산의 바람직한 과정은 선先 진상 규명, 후後 피해자의 권리 찾기라고 봅니다. 가해국이 양심에 따라 진상 규명에 앞서고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가해 주체가 먼저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입증해서 대일역사청산을 시도하고, 자발적인 해법 찾기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대응 시스템은 상당히 미흡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해국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은 했는가, 가해국의 역할 촉구 외에 진정한 해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했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진상 파악 및 규명 작업은 국가의 책무이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자산이 됩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의 피해 조사 결과가 세계기록유산이 되어 평화와 반전反戰의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되고, 이스라엘 야드바셈의 조사 결과가 독일 미래재단 탄생의 초석이 되었듯이 우리 정부도 그동안 축적한 피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가해국 일본이 스스로 전쟁 책임을 돌아보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정부의 해결 의지가 최우선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해결 의지는 바로 현재 개점휴업상태인 진상규명 업무의 회복 여부라고 생각하는데요. 진상규명 업무가 회복된다면, 국민들은 대통령께서 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해결 의지의 진정성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저서 「터널의 끝을 향해」를 살펴보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처음으로 공식 명문화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일명 김대중-오부치 한일 공동평화선언, 이하 공동선언)을 우리가 복원해야 할 한일 관계의 푯대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정혜경
학계에서는 이 공동선언이 한일 관계의 회복이자, 양국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 출발점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분명한 형태로 ‘사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일본의 식민 지배 문제를 공식적으로 명확히 했으며, 양국이 서로 가해-피해 관계를 인정한 첫 번째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양국은 공동선언에서 인정했던 것처럼 과오와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양국이 대일 역사 문제를 외교 현안으로만 인식하고 일시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평등한 관계를 설정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미래지향적 관계의 토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Q
특히 “한국 시민사회가 일본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과 ‘가해자의 양심을 두드리는 일’을 지속해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역사를 바로 세우고,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혜경
아직은 시민사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지형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보다 먼저 학계가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고 한일 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전쟁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엄중한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료 오독, 편향된 선행연구에 대한 무비판적 답습, 검증되지 않거나 부풀려진 내용이 시민사회에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를 전제로 학계와 시민사회의 피드백이 원활해진다면 시민사회는 건강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일관계의 살얼음판을 깨고 진실과 정의를 찾아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일본에도 양심적인 시민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한일 양국이 건전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먼지 쌓인 역사의 거울을 닦아내고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토양을 마련해야 합니다.
Q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8·15 경축사에서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북이 공동으로 강제동원 피해 실태 조사를 하는 것도 검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남북 공동 대응이 가능할까요?
정혜경
저는 강제동원이라는 주제만큼 적합하고도 필요한 남북 공동의 과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일역사문제의 해결 주체는 남측만이 아니라 남과 북이 함께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피해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그간 북측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 위원회’는 1995년에 ‘짓밟힌 인생의 외침’이라는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을, 2002년에는 ‘고발’이라는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집을 냈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문헌 자료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술서에 ‘일제의 일본군 성매매 범죄와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규명 문헌 자료집’이라는 제목을 붙여 통합판을 발간했습니다. 이는 북측이 일본과 미수교 상태이기 때문에 명부 등 문헌 자료 입수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도로 그쳤지만, 위원회에 있을 때 관계 기관과 협의 아래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남북한 공동조사’를 추진하려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정부 이후 우리 정부가 확보한 약 180만 명의 피해자 명부 중 30%나 되는 이들의 본적지가 북한 지역이고, 공탁금 문서에도 북한 지역 본적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위에서 언급한 구술서의 경우 문헌이 뒷받침해주지는 못하지만 제가 여러 자료를 비교 연구해 본 결과 상당히 신빙성이 높습니다. 일본 측 문서에 한국 정부가 확보한 자료와 북측이 검증한 피해 사실을 보강한다면 강제동원 자료의 완결성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731부대처럼 북측 피해자가 유독 많이 동원된 사례에 관한 공동조사, 북한 지역으로 동원된 남측 출신 본적자들을 위한 현지 추도 순례·공동 추도제부터 순차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평화를 견인하는 시작점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남북한 공동 대응은 우리 정부가 진상규명의 기능을 회복하고, 시민사회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동북아 3국의 공동 역사 인식, 올바른 역사 보존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안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혜경
먼저 ‘왜 우리는 70년 전의 대일 역사 문제를 기억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한 반일 감정이 아니라 자유, 인권,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교과서 왜곡·영토 문제 등 대일 역사 현안을 세계 시민과 공유하고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대일 역사 현안을 보편적 의제로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한일 역사 문제를 제대로 풀어간다면, 비단 양국뿐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 정착이나 신뢰 관계도 더욱 깊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Q
얼마 전 인천 부평구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흔적이 남아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 중 일부를 철거하지 않았습니까? 역사·문화를 보존하고 의미를 되새기면서 개발과 보존 간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위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혜경
아시다시피 기존의 재개발은 전면 철거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공간이 사라지면 그곳의 역사와 이야기도 사라지고 맙니다. 열악한 생활 환경 개선, 재산권 보장, 깨끗한 환경에서 살 주민의 권리도 당연한 고려 대상이지만, 이를 시대적 자료로 활용하고 의미 있는 역사·문화 자산으로 남겨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상암동 일본군 관사 문제가 보여주듯 ‘역사가 중요하다’라는 식의 계몽주의적 인식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지역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의미를 되살려서 삶 속에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시민들과 인식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존과 개발의 균형점을 찾아 나가려는 노력을 강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Q
일본은 침략의 역사를 왜곡·미화하고 있고, 일본의 강제동원과 착취 증거들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피해 생존자의 증언 채록, 현장 보존 등의 기록을 사료로 남기는 작업에 더 적극성을 띠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부터 풀어내야 할까요?
정혜경
진상 조사, 자료 입수, 기록물 분석 등 11년간 정부 조사 결과 축적된 자료는 피해자 권리 찾기의 근거가 되었고, 유골 수습·봉환은 일본 스스로 침략전쟁의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일 양국 민간 차원에서의 자료 발굴로 이어져 정부와 민간의 쌍방향-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해 알아가려는 시민이 많아질수록 정확한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자체의 경우 지역사회에 남아있는 유적을 활용해서 지역사에 대한 시민의 이해도를 높이고, 역사 현장에서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Q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학술 조사, 국제 교류 등과 관련하여 동북아역사재단에 제언 부탁드립니다.
정혜경
일제 강제동원 조사 및 연구가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중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이 토대가 될 만한 사업을 선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관련 법령 정리, 소사전 발간 등은 연구자 개인이 하기 어렵지요. 2013년에 재단이 개최한 국제 워크숍도 관련국 실태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인식을 확산했던 좋은 사례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공유해서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공유하고, 역사 갈등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는 과업을 재단이 담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일 역사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를 매개로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역 답사 프로그램이나 강제동원 역사와 관련한 지자체 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시각을 넓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