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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도시 이야기
또 다른 메이지유신의 기억, 아이즈와카마쓰
  •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학과 교수)

왕정복고 대호령인가, 왕정복고 쿠데타인가

186813, 막부"E섭정"E관백을 폐지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대호령이 발포되었다. 700여년간 이어져 온 섭관제와 260여 년간 이어온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부 타도파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오와리번, 도사번, 후쿠이번, 히로시마번과 연합하여 교토 황궁을 포위하고 기습적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는 왕정복고 쿠데타라고도 일컬어진다.

당연히 막부 측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 결과 같은 달 27, 사쓰마번군과 옛 막부군이 교토 남부의 도바"E후시미에서 충돌한 것을 시작으로 신정부군과 옛 막부군은 치열한 전투에 돌입하였다. 보신戊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또 다른 메이지유신의 기억, 아이즈와카마쓰하루아침에 조적朝敵이 되어 버린 아이즈번

왕정복고 대호령이 발포된 당시, 교토 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번津藩의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는 휘하에 경비부대를 두고 존왕양이파 지사 관리와 교토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1864년 금문의 변 때는 고메이 천황을 탈취하려는 조슈번 세력으로부터 궁궐을 지켜냈고, 이후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아이즈번에 의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 하지만 보신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막부 세력의 중심으로 여겨지면서 신정부군의 주적이 되었고, ‘근왕勤王을 상징하는 고메이 천황의 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적朝敵으로 간주되었다.

1868311일 신정부군이 에도성에 무혈입성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미토水戸에서 근신을 시작하자 이제 사쓰마번, 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의 공격은 여전히 옛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을 향했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옛 막부에 가장 충실했던 아이즈번의 번주 가타모리였다. 보신전쟁 중 발생한 국지전 중 하나인 아이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해 108일부터 와카마쓰성을 에워싸고 펼쳐지는 신정부군의 공격에 한 달간 버티던 가타모리는 마침내 116일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가타모리를 수호하던 백호대, 10대로 구성된 예비부대원 전원이 자결하는 한편, 승리를 확신한 신정부는 천황의 탄생일을 천장절로 포고하고, 원호를 메이지로 바꾼 후 메이지 천황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즉위식 직후 실시된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차는 왕정복고가 쿠데타가 아닌 명실상부한 대호령이 되었음을 막부파에게 보여주는 최대의 이벤트였다. 이듬해 627, 옛 막부 해군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탈출하여 에조시마 정부를 수립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도 항복하였다. 이로써 약 15개월 간 이어진 신정부=관군과 옛 막부 지지파=조적의 사투였던 보신전쟁은 막을 내렸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모시지 않는 아이즈번 병사들

보신전쟁에 승리한 신정부는 판적봉환을 실시하고 번주들을 지라라는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보신전쟁 관련자에게 포상을 하고, 보신전쟁에서 전사한 관군 측 전사자의 공적을 현창하고 위령하는 목적으로 도쿄초혼사를 창건하였다. 도쿄초혼사는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사에서 모시는 제신祭神은 단수單數이고, 제사일은 제신과 관련된 특정한 날이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경우는 보신전쟁을 비롯한 대내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복수複數제국 신민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으므로, 다른 신사와 달리 그때그때의 전사자를 제신으로 모시는 합사제를 개최한다. 또한, 제신이 복수이기 때문에 제신과 관련된 날을 특정하기 곤란하다. 그렇다면 창립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예대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개최되었을까.

창립 당시 예대제는 연 4회 개최되었는데, 그 내용은 도바"E후시미전쟁 발발(1/3), 우에노전쟁 발발(5/15), 하코다테 항복 일(5/18), 아이즈 항복일(9/22),1 즉 옛 막부 지지파를 조적으로 규정한 보신전쟁 승리와 관련된 날이다. 이후 태양력 시행에 따른 조정 과정을 거쳐 1879년에 56일과 116일 연 2회가 된다. 116일은 보신전쟁의 변곡점이었던 아이즈번의 항복일이고, 56일은 2회를 상정하고, 12개월의 중간에 해당하는, 즉 단순히 계산된 날이다.2 참고로 1879년의 예대제 개최일 변경은 보신 이래 국가를 위해 충분전사忠奮戰死한 영혼을 항상 진좌함으로써 영세불후의 법을 세우기 위해도쿄초혼사를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하고 별격관폐사로 지정한 지 10일만의 조치였다. 1879년의 예대제 개최일 변경은 도쿄초혼사만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도 여전히 옛 막부 지지파를 배제하고 천황군만을 위령의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2019년 야스쿠니 신사 창립 150년 행사를 앞둔 현재에도, 보신전쟁에서 전사한 옛 막부 지지파와 서남전쟁을 일으켰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합사 문제가 또다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메이지유신의 기억, 아이즈와카마쓰2018, 보신 150년을 기념하는 패자敗者의 메이지유신

아이즈번의 전통을 도시의 아이덴티티로 삼고 있는 아이즈와카마쓰시에서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보신 15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슬로건은 “‘를 이어가자 미래로. 보신 150이다. 신정부에 의해서 조적으로 규정된 아이즈번을 로 재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왕정복고 대호령쿠데타로 재규정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결국 근대 천황제의 정당성을 묻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게 된다. 물론 이 같은 가능성은 아무리 패자의 복권을 도모하는 아이즈와카마쓰시라도 정치적부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사무라이 도시 아이즈라는 부제로 해결되고 있다. 보신전쟁의 의미를 관군조적이 아니라 주군에 대한 ’, 20세기에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의 전통으로 발견한 무사도의 논리로 패자 아이즈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조적이라는 근대 천황제의 근본적 규정에서 벗어 던질 수 있는 논리적 근거까지는 제공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아이즈와카마쓰시의 보신 150년 기념 사업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승자 중심으로 기념하려는 아베 총리, 야마구치현, 가고시마현과 그 입장을 달리하는 패자의 고민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일자는 양력 실시 이전이므로 음력으로 계산

2 야스쿠니 신사의 예대제는 1912년에 430(러일전쟁 당시 육군 개선 관병식 개최일), 1023(러일전쟁 당시 해군 개선 관함식 개최일)로 개정되어 1945년까지 개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