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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와
인터뷰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갖춘 조선 후기의 대신 윤지완
  • 김 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세상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다. 초월적 존재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의 이름은 땅이나 집일 것이다. 과거에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소유하는 땅이나 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주체의 크기를 국가로 확대하면 그 공간은 영토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영토는 국민·주권과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 지 요소다. 유사 이래 국가사이의 모든 분쟁과 충돌은 영토를 둘러싸고 일어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토를 지키는 것은 국민과 그 국민이 소유하고 행사하는 주권을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20세기 이후 기술이 발달하고 의식이 진보하면서 여러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지만, 영토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엄존할 것이다.

우리나라 영토에 있는 수많은 지명 가운데 가장 뜨겁고 민감한 이름은 독도. 그 이름처럼 동해에 홀로 떨어진 작은 섬에는 영토 문제의 높은 파도가 오래도록 일렁이고 있다. 우리에게 독도와 연관된 가장 유명하고 익숙한 인물은 안용복安龍福, 1658~?일 것이다. 그는 1693(숙종 19)1696(숙종 22) 두 차례 일본을 오가며 독도의 영유권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안용복은 그런 공로를 포상 받기는커녕 처형될 위험에 놓였다. 건국 이후 울릉도와 독도를 비워 놓는 공도空島정책으로 일관한 조선 조정의 안이한 영토의식과, 작은 섬을 둘러싸고 일본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극적 외교정책이 빚어낸 이지러진 결과였다.

안용복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그를 옹호해 끝내 살려내는 데 중요하게 기여한 사람은 윤지완尹趾完, 1635~1718과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었다. 60대에 접어든 나이로나, 정승을 역임한 경력으로나 그 두 사람은 당시 조선 조정에서 가장 비중 있는 원로였다. 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당당히 대응해 우리의 땅과 바다를 지켰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된 사실이 보여주듯 윤지완은 숙종때를 대표하는 신하였다(남구만도 함께 모셔졌다). 그는 소론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83년에 걸친 긴 생애 동안 예송과 당쟁과 환국이 교차한 격동의 시대를 헤쳐갔다.

윤지완은 본관이 파평이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그의 조상은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증조부 윤엄尹儼은 중종 때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조부 윤민헌尹民獻은 사헌부 장령과 평안도 절도사 등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윤강尹絳은 예조판서까지 올랐다. 윤강의 네 아들, 그러니까 윤지완의 형제는 모두 우뚝한 경력을 지녔다. 큰 형 윤지미尹趾美는 사헌부 지평, 둘째 형 윤지선尹趾善은 좌의정, 동생 윤지인尹趾仁은 이조·병조판서에 올랐고, 이 글의 주인공인 윤지완도 좌의정을 지냈다.

윤지완은 국정의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특히 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자취를 남겼다. 먼저 47세 때인 1682(숙종 8) 통신사 정사로 임명돼 47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것이 주목된다. 판서나 정승처럼 붙박이 관직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파견된 통신사에, 그것도 정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외교 문제에 정통한 관원이었음을 알려준다.

국제 문제와 관련된 그의 식견은 안용복 사건에서 다시 한 번 입증됐다. 1693년 안용복의 1차 도해 1년 뒤 대마도주는 울릉도 문제에 이견을 제시했다. 그동안 조선이 보낸 서계에서는 울릉도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갑자기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니 삭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윤지완은 단호히 반대했다. ‘이미 국서를 보냈으니 다시 고칠 수 없고, 울릉도는 우리 영토니 우리나라 사람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책망하면 왜인이 반론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남구만도 동의했다. 두 대신의 의견에 따라 조선 조정은 일본인의 울릉도 방문을 단속하라고 일본에 요구했다.

2년 뒤 윤지완은 안용복을 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앞서 말한 대로 안용복은 1696년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갔지만 돌아온 뒤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과 좌의정 윤지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는 안용복이 금령을 어기고 다른 나라에 가 문제를 일으켰으니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숙종도 동의했다.

이런 흐름을 바꾼 사람은 윤지완이었다. 그는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해 안용복을 살렸고, 나아가 독도 문제를 둘러싼 대일 외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안용복이 다른 나라에 가서 외람되게 나랏일을 말하면서 조정朝廷에서 시킨 것처럼 했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니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합니다다만 대마도 사람이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우리나라가 에도江戶와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용복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우리가 안용복을 죽이는 것은 법률로는 옳겠지만 계책으로는 그릇된 것입니다안용복을 죽여 왜관倭館 밖에 효시梟示하는 것은 왜인을 기쁘게 할 뿐이며 우리는 스스로를 손상시킬 뿐입니다.

남구만은 이번에도 동의했고, 안용복은 처형을 모면하고 유배되었다. 물론 이런 결과도 영토 문제에 관련된 당시 조선 조정의 미숙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사안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두 대신 덕분에 고난과 희생으로 독도를 지킨 인물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영의정 유상운의 말대로 윤지완과 남구만이 안용복을 처단하는 데 반대한 까닭은 왜인의 기세를 꺾어 자복시킨 것을 그의 공로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유명한 경구는 역사의 현실적·정치적 의미를 날카롭게 압축하고 있다. 국가나 개인이나 과거에 집착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쉽게 잊고 흘려 보내서도 안 된다. ‘정말 뛰어난 학생은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한번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국가에 적용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용복이 다른 나라에 가서 외람되게 나랏일을 말하면서 조정朝廷에서 시킨 것처럼 했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니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합니다. 다만 대마도 사람이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우리나라가 에도江戶와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용복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안용복을 죽이는 것은 법률로는 옳겠지만 계책으로는 그릇된 것입니다. 안용복을 죽여 왜관倭館 밖에 효시梟示하는 것은 왜인을 기쁘게 할 뿐이며 우리는 스스로를 손상시킬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