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고대 그리스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테미스 토클레스Themistocles가 남긴 말이다. 이는 21세기 해양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신라의 바다 황해>의 저자이자 해양의 역사를 꾸준히 연구해 온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를 만나 황해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대담 우성민 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권덕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역사관광·외교학부 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한국사학회 이사 및 편집위원, 한 국연구재단 전문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부 산외국어대 역사관광·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역사 만들기: 그 허상과 실상>, <신라의 바다 황해>,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고대한중외교사-견당사 연구>, <한국 고대 금석문 종합 색인> 등이 있다.
Q1. 교수님께서는 일찍이 한국 고대 황해의 역사성을 밝히는 다양한 연구 논저를 발표 해오시면서 해양을 통한 동아시아 국제 교류의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여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주제로 연구하시는 지요?
권덕영 지난 십수 년 동안 저는 늘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황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신라의 바다 황해>를 출간한 이후, 사실지금은 황해를 잊고 지냅니다. 대신 중국 당나라로 이 주한 재당 한인韓人들의 묘지명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작업을 하다 보니 만만치가 않네요.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지요.
Q2. 근래 들어 해양사가 매우 중요한 역사 연구 이슈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변국은 21세기 동아시아 해양사를 선도하고 입지를 강화하는 추세인데 서구, 중국, 일본 학계와 비교하여 국내 학계의 동향은 어떠한 가요?
권덕영 서구와 일본의 해양사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1960~70년대에 이미 전근대 동아시아 해역의 해양 활동을 세계적 수준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라시아사’라는 광역의 역사 단위 속에서 동아시아 해양의 역사적 역할과 의미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초기에 주변 국가들에 비해 해양사 연구가 크게 부진했습니다만 개혁 개방과 경제 성장 등의 사회 변화, 특히 2013년에 출범한 시진핑習近平정부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으로 해양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해양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육당 최남선과 김상기 박사 같은 분이 해양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 으나, 해방 후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를 거쳐 문민정부 이후 해양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장보고의 해상 활 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해양사 연구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다만 서구 여러 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는 전문 학회와 연구소를 중심으로 해양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전문 학회와 연구소가 전무합니다. 그러다 보니 각 분야의 성과를 공유하지 못 하고, 연구가 체계화되지 않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해양 사 관련 학회와 연구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Q3. 최근 중국 CCTV가 방영한 ‘해양 실크로드’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해양 실크로드를 서역과의 교류 통 로로 설명하였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의 해양 실크로드 연구 현황과 방향은 어떻습니까?
권덕영 해양 실크로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용어입니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전혀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은 대개 해양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을 광둥성 광저우廣州 혹은 저장성 항저우杭州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광저우 혹은 항저우에서 동쪽으로 황해를 건너 경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일본 은 경주에서 혹은 광저우 또는 항저우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 나라奈良와 교토京都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중 국과 일본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어떤 근거로 해양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경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부터라도 한국 해양사의 범위를 넘어, 해양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아시아 혹은 세계 해양사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Q4. 교수님께서는 동아시아 바다, 특히 황해黃海의 역사성에 주목하면서 유럽의 지중해를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하셨습니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 역학 관계를 설명하는 데 어떻게 일조할 수 있을까요? 또, 탈 중국 중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재구성이 가능할까요?
권덕영 저는 ‘황해’를 탐구하면서 황해의 지중해적 성격에 특히 주목했습니다. 지중해 주변은 각 지역이 바다로 격절됨으로써 각기 독창적인 문화가 발생하고, 그러한 문화는 다시 지중해라는 해양 공간에서의 교류를 통해 문화 간 융합과 동화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지중해를 둘러싼 일정 지역에는 공통의 문화 요소를 갖춘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됐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지중해도 여타의 ‘지중해’地中海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는그리스 문화도, 로마 문화도, 오리엔트 문화도, 기독교 문화도, 이슬람 문화도 아닌 ‘지중해 문화’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천 년 동안 황해에서의 교류를 통해 융합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 문화도, 한국 문화도, 일본 문화도 아닌 ‘황해 문화’이고 ‘황해 문화권’일 뿐입니다. 이처럼 해양 교류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사를 해석하면, 딜레마에 빠져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사의 프레임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5. 교수님께서는 신라시대 해양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중요하게 다루셨는데, 신라에서 왜 선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신라의 선부가 조선, 항해뿐 아니라 해상 무역과도 관련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권덕영 저는 <신라의 바다 황해>에서, 신라는 황해를 효과적으로 ‘경영’함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고, 또 국제 감각을 갖춘 동아시아의 일등 문명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선부는 바로 신라 황해 경영을 기획하고 실행한 핵심 관서였습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겪으면서 바다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문무왕 때 선부를 예부나 병부처럼 령令을 최고 우두머리로 하는 오늘날 장관급의 1급 관청으로 승격 독립시켜, 선박과 해운에 관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라의 해양 경영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그러한 전통은 신라 멸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후 20세기 후반인 1993년 문민정부에 이르러 해양수산부가 만들어지면서 신라의 해양 경영 전통을 회복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해양수산부의 뿌리는 바로 신라의 선부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제가 신라의 선부를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Q6. 교수님의 저서 <신라의 바다 황해>를 살펴보면 조공·책봉에 대하여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일국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의 관점에서 조공·책봉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권덕영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조공·책봉만한 개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을 어떻게 보느냐’는 사실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굳이 답하자면,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은 유교 사상에 기반한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예적禮的 국제질서였고, 비록 여기에 종주국宗主國과 번국藩國의 상하 위계질서가 규정되어 있으나 그것은 관념적인 이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나름의 합리적 국제 관계의 기본 틀이었습니다. 너무 간략하게 줄이다 보니 오해의 소지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동의하기 어려우시면 저의 저서를 참고하시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어쨌든 동아시아의 조공·책봉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정치적 지배와 복종을 통한 종속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7. 동아시아 해양사의 연구 범위를 확대하는 차원에서라도 역사학계의 남북 학술 교류는 매우 중요합니다. 남북 학계가 향후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권덕영 북한의 역사 연구 성과를 자세히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몇통로를 통해 접했던 북한의 해양사 연구는 변변한 저술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진했습니다.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와 남북한 역사 학술 교류가 단속적斷續的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해양사를 주제로 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경기·충청·전라도 서해 연안 곳곳에서 황해를 항해하던 신라와 고려시대 선박이 여럿 발굴되었습니다. 고대 한중 해로의 중간에 위치한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도 서해 연안에서도 신라와 고려시대 선박이 발굴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남아있는 해양 교류 관련 유적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남북한이 해양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Q8. 역사 화해를 통한 동북아 평화 발전을 추구하려면 균형 잡힌 동아시아 해양 교류사 연구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 당사국 차원에서 한국사 ‘패싱passing’을 지양하기 위해 한국 해양사에서 활성화해야 할 분야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동북아역사재단에기대하는 역할과 제언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권덕영 최근 언론을 통해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아직 ‘한국사 패싱’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듣고 보니 상당히 신선하고 또 함축성이 있는 말인 듯합니다. 전근대 중국 문화의 선진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래서 주변국들은 중국의 문화와 문명을 수용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했는데, 일본은 한반도를 매개로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일본서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의 문화를 직수입했다고 하여, 한반도를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간자적 역할에서 배제 혹은 무시하는 경향이 일어났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교류사에서 한국사를 ‘패싱’한 거지요. 그 과정에서 일본이 주목한 역사상은 바로 견당사遣唐使입니다. 일본은 총 15회의 견당사를 파견했는데, 그들이 중국과 직거래하여 중국의 문화와 문명을 수용했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일본은 고대문화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한반도 삼국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한 역사 해석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일본 견당사는 대부분 한반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를 왕래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이 한국사를 ‘패싱’하는 것은 일본 스스로 문화적 열등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잘못된 동아시아 역사관을 극복하는 데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해양사입니다. 한국사 패싱을 지양하기 위해 특정한 분야만이 아니라 선박과 항해, 해상 무역과 문화 교류, 수중 발굴과 해양 신앙 등 해양사 전반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겠지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이러한 과업을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중·일 삼국이 공유하고 교류하던 전근대 동아시아 해양에 관한 연구를 통해 오늘날 국가 간 역사 분쟁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재단에서 해양사 연구에 각별히 관심을 가져줄 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