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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도시 이야기
창사(長沙), 두 얼굴의 조화
  • 공원국 (작가)

도대체 왜, 땅은 동남쪽으로 기울었습니까(東南何虧)?”

코끼리를 삼킨 그 뱀, 그예 얼마나 컸습니까(一蛇呑象, 厥大何如)?”


2,300년 전 전국시대의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천문(天門)>에서 하늘에게 묻는다. 중국은 신화(神話)가 사라진 나라다. 동시대인 플라톤이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자가 중국에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격한 인문주의를 들고 나온 이래 신화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굴원의 질문들을 근거로 중국 신화를 근근이 복원하는 중이다. 인간 중심주의의 출발은 좋았지만 조화를 잃은 것이 문제다. 인간 중심주의가 극에 달해 오직 물신(物神)만 날뛰는 오늘날, 신성(神性)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중국에도 여전히 신성과 물성의 조화가 남아있는 곳이 있으니, 굴원이 활약하던 옛 초나라 땅, 오늘날 후난성의 수도 창사(長沙)가 그곳이다.

 

시공의 균형을 갖춘 도시

도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모이고 모여 커진 집단 주거지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도시들은 개방성 및 역동성을 한 축으로 하고 폐쇄성과 규율을 그 대립 축으로 갖추고 있다. 전자는 도시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지만 중앙 권력이 제어하기 힘들기에,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도시가 일정 크기에 도달하면 항상 후자를 강조한다. 최소한 B.C.1,000년대에 이미 국도에 사··(··)이 분리 거주하는 개념이 만들어진 듯하다. 우리는 당대의 장안성이나 후대의 북경성이 무수히 고립된 방()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황제 1인을 정점으로 하는 체제가 거의 2,200년이나 이어져 오면서 주례(周禮)에 나오는 바둑판처럼 꽉 짜인 국도의 개념은 끈질기게 힘을 발휘하며 날로 정교해졌다. 말하자면 도시는 사방의 인간들을 모으는 시장의 확대판인 동시에, 좁은 공간에 인간들을 짜 넣는 감옥 혹은 유사시 인간들이 쫓겨 들어가는 거대한 요새이기도 했다. 어떤 일면만이 강조되고 비대해질 때 도시는 균형을 잃어, 전체적으로 감옥 같거나 시장판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하루만에 숨 막히는 자금성 담장과 광고판으로 도배된 상하이 왕푸강가를 오갈 때면 항상 강제로 옷을 갈아입은 듯한 당혹감을 느낀다. 과잉을 떠나 또 다른 과잉으로 들어간 느낌 때문에.


창사(長沙), 두 얼굴의 조화그래서 가끔씩 장사처럼 시공의 균형을 갖춘 도시, 여러 얼굴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도시를 볼 때 막힌 숨이 터진다. 상강(湘江)의 물줄기 동쪽으로 마천루 숲은 밤마다 화려한 조명을 뽐내지만, 강 서쪽 악록산(岳麓山)은 깊은 수림에 덮인 채 묵묵히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이런 미학적인 대조점은 공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고대에 굴원이 북방에서 이미 힘을 잃어가던 신성의 미학을 가꾸고 간직했다면, 중세에 주희(朱熹)가 이곳 악록 서원에서 학문의 남북시대를 열었다. 송의 성리학자들은 경세학에 머물던 기존의 유학을 존재론적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황제가 현실 세계의 정점에 있지만, 지적인 세계에서는 자신들이 정점이었다. 이제 학문의 경향이 다시 실증과학으로 넘어왔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 동아시아 학문의 주류는 주자학 다시 말해 악록서원학파였다. 또한 장사 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근현대사의 격랑을 정반대 방향에서 헤쳐 나갔다. 이 서원에서 공부했던 위원(魏源)은 강대한 청나라를 복원하고자 했고, 쩡궈판(曾國藩)과 쭈오쫑탕(左宗棠)은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부지하고자 했다. 1938년에서 1944년까지 중·일 양측이 거의 100만에 달하는 연인원을 동원해 무려 네 차례 벌인 창사대회전(長沙大會戰)은 중일전쟁 시기 인명 손실에서 첫 손가락에 드는 참혹한 전투였다. 19446월 창사가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악록산 포대에 포탄도 없이 남아 있던 최후의 수비군은 도륙을 당했다고 한다. 상하이(上海)나 우한(武漢) 등 더 큰 도시들도 순식간에 속절없이 넘어갔건만 이 도시 군민들은 함락 전까지 세 차례나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면서 장제스(蔣介石)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으니, 이 땅의 근기(根氣)는 전국에서 갑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터, 호남제일사범학원에서 공부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증국번 등이 지키고자 했던 왕조 시대의 질서와 장제스가 대표하던 서구식 근대국가의 질서를 깡그리 뒤엎어버렸다.

 

조화 속에 공존하는 개방과 방어

이렇듯 악록산과 상강, 상강 동과 서의 대비에서 보이듯 창사 그곳에는 뭔가 특출한 것들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방과 대비되는 남방의 분방한 혼이 있고, 그 분방함 속에 역시 여타 지역이 모방할 수 없는 강단이 있다. 세상을 온전히 머릿속에서 재구축하려는 학자들의 몽상이 살아 있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에 대응하려던 정치가들의 끈기가 있으며, 현실에서 세상을 뒤집으려던 혁명가들의 투지가 살아 있다. 혁명가 마오쩌둥이 마치 선배 시인 굴원처럼 결정적인 국면마다 격정적인 시로 감정을 토로한 것도 전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물론 낭만파 시인 굴원 자신도 정치적 이상이 좌절하자 상강에 투신해 죽은 강골 정치가였다. 알려진 대로 단오(端午)는 이 시인을 기리는 절기다.

이 도시에서는 개방과 방어도 조화 속에 공존한다. 청대에는 호남에 벼꽃이 피면 전국의 기근이 끝난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곡물이 풍부했고, 물줄기가 있기에 나눠줄 수 있는 넉넉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는 언덕처럼 아담하지만 노도같이 밀려드는 침략자들을 물리친 산도 있다. 산은 작지만 울창한 숲으로 덮여 실제보다 커 보이고, 전몰한 포병들처럼 실제 크기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웃음이 많고 외부인에게 상냥하지만 후난 요리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맵다. 이 도시를 들를 때 박물관을 빼먹지 마시라. 마왕퇴(馬王堆) 한묘의 턱없이 웅장한 목곽과 가녀릴 정도로 섬세한 백서화(帛書畵)의 기묘한 대비가 창사의 두 얼굴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니까. 그리고 도시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이동하면 보이는 동정호와 악양루를 참관하시라. 마지막으로, 악록산을 유람할 때는 김구 선생의 요양처도 잊지 마시라. 우리 임시정부는 이곳을 거쳐 중경으로 들어갔다. 산은 낮고 두루뭉술하지만 숲이 그토록 울창하기에 고단한 우리 역사의 한 자락도 소중히 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못난 후손은 두 손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