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일본 아베 총리의 1차 집권기에는 “A형(class) 전범들은 일본법상으로는 전범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2차 집권 첫해인 2013년에도 “연합국측이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언은 극동국제군사재판소 11명의 재판관 중 인도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이 “침략을 정의하기 곤란하다”며 무죄 주장 개별의견을 판결문에 첨부한데서 기인한다. 또 당시 변호인단의 “도쿄 재판은 승자의 ‘사후심판’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1946년 이미 종결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사실 팔 판사의 견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제기된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이라는 개념 정의는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단지 ‘승자에 의해 패자에게 붙여진 라벨’이라는 주장이었다.
한편 극동재판이 한일병합을 둘러싼 일본의 침략 문제를 평화에 대한 범죄로 다루어야 했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연합국이 일본 전범을 어느 시점으로 기산하느냐는 논의에서도 일본을 포함하여 62개국이 서명한 1928년 ‘Kellog-Briand Pact(부전조약, 파리협정)’를 기점으로 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일본 침략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일본의 침략을 입증하는 책임은 한국에 있는 것이다.
전후 전시범죄 처벌에 관한 국제적 합의 : 전쟁의 종료를 위한 경고
연합국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부터 전후 전쟁범죄인을 처벌한다는 의사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1942년 1월 13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열린 회의의 ‘전쟁범죄의 처벌에 관한 선언(Inter-Allied Declaration on Punishment for War Crime)’은, 독일 점령지에서의 공포정치를 비난하고 평화적 인민에 대한 폭행에 대해 소추 . 처벌할 결의를 표명했다. 이후 대일본 경고가 있었다. 그 회의를 참관했던 운쯔 킹(Wunz King)은 중국이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반드시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1942년 8월 21일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보다 명확한 경고를 했다. 미국은 추축국들에 의하여 벌어진 전쟁범죄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기소에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야만적 범죄에 관련된 정보와 증거가 적절히 이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회의는 벨기에, 프랑스 등 9개국 망명정부에 의해 개최된 것이지만, 영국, 미국, 소련, 중국 등 여러 나라도 참관인을 파견하고 있었다.
1943년 10월 연합국 전쟁범죄위원회가 런던에 설치되어 전쟁범죄인의 처벌에 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위원회는 수십 개의 조사단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파견하였다. 연합국에 의하여 해방된 지역에 파견되어 조사 활동을 벌인 이들은 증거의 수집, 증인의 행방, 주민의 인터뷰, 석방된 포로의 진술 등을 채취했다. 1943년 10월 30일 ‘모스크바 선언’은 가해자들이 그 범죄가 행해진 국가의 법률에 따라 그 국가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임을 규정하였다. 또한 범행이 특별한 지역적 연고를 가지지 않은 주요 전범들의 경우에는 연합국 정부의 결정에 의해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도쿄 재판이나 뉘른베르크 재판이 후자의 언급에 의해 구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1월 1일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계기로 미국, 영국, 소련 3국 수뇌의 서명을 받은 ‘잔학행위에 관한 성명서’가 발표되어 잔학행위 등을 한 군인이나 나치스 당원을 독일이 범죄지 국가로 인도하는 것이 휴전 조건이며, 지역적으로 한정되지 않는 중대 전쟁범죄인에 대해서는 연합국의 공동결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고 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막바지로 다가서면서 이러한 전범처벌의 의지는 더욱 확고히, 빈번하게 언급되었다.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에 관한 상세한 소식이 전해진 1944년 1월, 미 국무성 헐 장관과 영국의 에덴 외무장관이 동시에 책임자의 처벌을 경고했다. 프랑스의 국민해방위원회 수반인 드골 장군도 1945년 5월 프랑스인과 인도차이나인들을 학대하는 모든 일본인은 전범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1945년 6월 미국은 스위스 정부를 통하여 연합군 포로 학살을 허용한 문서를 소지하고 있음을 일본에게 통보하였다. 가장 중요한 논의는 역시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이었다. 이 선언 제10항에서 “미국, 영국, 중국, 그리고 소련은 일본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노예화되거나 멸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포로에 가해진 학대를 포함하여 모든 전쟁범죄자들에 대하여 엄격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IMTFE)의 설립과 개별 전범재판소
1946년 5월 3일 도쿄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정이 개정했다. 이 재판정은 흔히 ‘도쿄 전범 재판’으로 불리지만 실제 도쿄에서만 열린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지배 지역에 12개, 영국 지배 지역에 11개, 중국에 10개, 오스트레일리아에 9개, 미국 점령 지역에 5개, 그리고 프랑스 지배 지역과 필리핀에 1개씩 총 50개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재판정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주의 범죄자들을 재판하는 50개 법정이 아시아 지역에서 운영되는 동안 조선(한국)에는 그런 법정이 없었다. 당시 미 군정은 “친일적 또는 민족 반역적 행위”가 사법 처리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1945년 11월 20일 개정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IMT)의 틀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인도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가 도입된 데 추가하여 도쿄에서는 ‘평화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peace)’가 도입되었다. 법정의 구성 방법도 달랐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가 진정한 ‘국제’ 법정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데 비해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미국이 기소권을 장악하는 등 지배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천황의 면책, 731부대의 제외 등과 같은 자의적 운영이 가능했다.
이들 법정에서는 B ․ C형 전범재판을 실행하였고 피해국이 스스로 규정을 만들어 각국 법정에서 재판했다. 이들 재판에서 총 937명이 사형, 4,479명이 유기·무기징역,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실형은 주로 현장의 중간관리직으로 대대장, 중대장 계급이 많았고 상관의 명령을 따른 하급병사도 기소됨에 따라 한국인은 총 148명이 유죄, 그중 23명이 사형되었다. 그러나 이들 한국인은 복역 이후 일본 국적이 박탈되어 일본 정부의 보상과 원호를 받지 못하였다. 조사된 각국의 전범 처형자 수로는 미국이 140명, 호주가 119명, 영국이 241명, 화란이 220명, 중국이 149명(인민재판으로 3,500명 처형은 별도), 프랑스가 26명, 필리핀이 17명, 소련이 약 3,000명(비밀재판)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서의 인도에 반한 죄
극동에 있어서 중대전쟁범죄인의 공정하고도 신속한 심리 및 처벌을 위해 1946년 1월 19일 마련된 이 헌장은 제1장 재판소의 구성, 제2장 관할 및 일반 규정, 제3장 피고인에 대한 심리, 제4장 재판소의 권한 및 심리의 집행, 제5장 유죄 무죄의 판결과 형의 선고를 규정하고 있다. 중요한 법률적 및 절차적 규정은 이 헌장의 부속문서인 재판 절차 규칙, 기소의 유죄 항목 내용 등에 담겨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관할의 문제였다. 재판소가 취급할 수 있는 범죄는 헌장 제5조에서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법규 또는 관습법에 위반한 죄, 그리고 인도에 반한 죄 세 가지였다. 이 헌장이 규정하는 ‘인도에 반한 죄’는 다음과 같다. “c. 인도에 반한 죄 : 즉 전쟁 전 또는 전쟁 중 행한 살인, 몰살, 노예화, 추방 기타 비인도적 행위 혹은 범행지 국내법 위반 여부를 불문하고 본 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범죄의 수행으로서 또는 이에 관련하여 행한 정치적 또는 인종적 이유에 의한 박해 행위, 상기 범죄의 어느 것을 범하고자 하는 공동계획 또는 공동모의의 입안 또는 실행에 참가한 지도자, 조직자, 교사자 및 공범자는 그러한 계획의 수행상 행하게 된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에 의하여 행사되었던가를 불문하고 책임이 있다.”
1946년 10월 1일 종결된 뉘른베르크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통례의 전쟁범죄에 관해서는 이미 국제적 규범과 처벌의 관행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평화에 반한 죄와 인도에 반한 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대된 전쟁범죄 유형이다. 평화에 반한 죄는 침략전쟁 그 자체를 처벌하는 것이므로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에 정치적 보복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다만 인도에 반한 죄는 종래의 형벌규범에 비추어도 죄가 되는 것들을 인도에 반한 죄목의 이름하에 통합하여 개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장기간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포로 학대 등 전시법규 위반 및 일반 민간인에 대한 잔학 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태평양 전쟁의 개시가 당시 1940년 미국의 수출통제에 기인한 국민경제의 파탄을 돌파하기 위한 소위 “자위적 전쟁”이었다는 황당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생체 실험’ 등 주요 인도 범죄에 대한 각국 처벌 사례 : 난징 및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
중국 난징 전범 재판에서는 1956년 6월 9일부터 7월 20일까지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을 지낸 다케베 로쿠조(武部六藏), 육군 중장 후지타 시게루(藤田茂) 등 B형 전범 36명의 재판이 열렸다. 중국은 1950년 7월 당시 소련으로부터 인수한 일제 관동군 전범들을 랴오닝성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용해 조사·교화했으며 1956년 선양과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에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45명을 기소, 8∼20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했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서 이루어진 목격자 진술 및 재판에서 이용된 매장 기록을 보면 약 30만 명의 민간인과 비무장 군인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에 걸쳐 소비에트 연방 하바롭스크의 장교 회관에서 일본군 전범 피고에 대해 6일간 열렸던 군사 재판이다. 일본인 피고들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관동군 지도부와 생체실험 및 세균전 관계자들이었다. 주된 혐의는 1939년 노몬한 사건, 소련에 대해 전쟁연습을 행한 1940년 관동군 특종연습, 731부대와 100부대의 생체실험 등이다. 이 재판에서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관동군 사령관과 세균무기 제조와 생체실험을 행한 가지츠카 류지(梶塚隆二) 군의중장, 다카하시 다카아쓰(高橋隆篤) 수의중장, 가와시마 기요시(川島清) 중장이 각각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나머지 인물들도 2년에서 20년까지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가벼운 형을 받은 사람은 기한이 되어 석방돼 일본으로 돌아왔고 감옥에서 병사하거나 자살한 이를 제외한 이들은 1956년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 간의 국교회복 후 감형으로 모두 일본에 되돌아왔다. 특히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전후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일부는 선양, 푸순 및 타이위안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심리와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6년, 만주 유형 10년의 강제노동을 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 받았다. 소위 ‘731부대’를 통해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수는 약 1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드물게 미군과 영국군 포로도 섞여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생물 무기도 만들었는데 이것까지 합치면 무려 50~60만 명이 넘는 이들이 희생당했다. 이시이 시로(石井四郎)는 전후 도쿄 재판 증언에서 “마루타는 총 3,850명으로 조선인이 254명, 러시아인이 562명이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었다”고 진술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한계와 과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 군국주의가 침략의 손을 뻗지 않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에 점령된 영토는 나치 독일의 그것보다 더욱 광대하였다. 거의 전 세계 국가들을 상대로 남북 7,000km, 동서 1만km에 달하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사자 117만 명, 부상자 461만 명, 일반 시민의 사상자 678만 명의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전쟁 과정 혹은 점령지에서 일본이 벌인 잔혹한 범죄는 그에 대한 응징이 예고된 정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기나긴 침략과 학살의 전쟁을 일으킨 최고 지도자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멀쩡하게 전쟁의 책임을 면하였고 아우슈비츠의 그 유명한 생체실험과 비견될 만한 731부대의 잔혹한 범죄는 미국 정부의 우산하에 불문 처리되었다.
일본은 아직도 대일평화조약 제11조에 명시된 ‘판결(judgements)’을 두고 “‘재판’은 수용하지만 ‘판결’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극동재판은 최단으로 기산하여 1928년 부전조약 이후 15년 전쟁의 기간에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책임을 묻고 그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잔혹한 범죄를 처단하기에 너무나 큰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대다수 일본인 학자와 정치인, 일반 국민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들의 정치적 보복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이 재판이 실체적 . 절차적으로 위법한 재판이었으며 나아가 침략 행위와 비인도적 행위 등이 연합국에 의해 조작되었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맹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비판은 나아가 일본이 벌인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었다는 것으로 확대 비약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의 과거 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망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침략 전쟁기간 일본은 아시아 국가와 민족에게 사상 유례 없는 학살과 참혹한 고통을 주었지만, 일본이 간혹 표하는 아시아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 의사 표시는 결국 아무런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이며, 극동국제군사 재판소의 판결은 동아시아 국가 정의에서 그저 최소한의 양심에 지나지 않는다.
1) 흔히 쓰이는 “A·B·C급 전범재판”이라는 용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이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 제5조에 규정된 3가지 관할 범죄인 평화에 반한 죄, 통상의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를 편의상 A, B, C로 분류한 것이다. 영어로 “Class A·B·C”라 하는 것은 범죄의 중대성에 따라 등급적으로 나눈 개념이 아니기에 “A·B·C급”이 아니라 “A·B·C형(부류)”이라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침략전쟁에 관한 평화에 반한 죄는 고위 지도자들에게 해당되었기에 통상의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로 처벌받은 다수 하급 군인이나 관리보다 죄가 더 중하다고 오해할 수 있으나, 국제법상 이들 유형별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