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준(申彦俊, 1904-1938)은 1926년부터 동아일보 통신원, 1929년에서 1935년까지 동아일보 중국(상하이 . 난징) 특파원으로 활약한 언론인이다. 그는 1998년 1월에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중국 관계 논설자료는 고(故) 민두기 교수가 엮은 《신언준 현대 중국 관계 논설선》(2000)에 모아져 있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폐병이 악화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던 중 1938년 1월 20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와 상하이 망명 후의 활동
신언준은 1904년 11월 4일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미남리에서 신정균과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산 신씨로 호가 은암(隱巖)이다. 평안도는 정치적 차별을 받았던 지역으로 근대 이후에는 그 좌절의 돌파구를 종교와 교육에서 찾았던 지역이다. 평원군 숙천은 천도교 강세지역이었으며, 그의 집안은 천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상하이에서도 천도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1926.4.1. 창간)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10세까지 한문을 수학했고 14세였던 1918년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가한 신언준은 오산고보를 졸업하지 못하고 고향에 머물다가 192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 망명 후 항저우의 영문전수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곧바로 항저우로 갔으며 이후 그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우쑹(吳淞)의 국립정치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에는 뚱우(東吳)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조상섭은 1924년 상하이 교민 자녀 교육기관인 인성(仁成)학교 교장이었는데, 6월 7일 이전 학감이 사직하자 상하이대한교민단의사회의 인준을 받아 신언준을 학감으로 임명했다. 당시 인성학교에서는 중국어와 영어수업을 중시하면서도 한국혼을 강조한 수업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신언준은 1924년 3월 21일 상하이청년동맹회 회의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그가 관여한 상하이청년동맹회와 상하이한인청년회가 사회주의로 경도되었다고 생각하자, 그는 1927년 10월 27일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조상섭의 보증으로 입단했다. 신언준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안창호를 보좌하는 비서로 주로 통역과 서기를 담당하였고, 한·중 민족 간의 협력을 강조하던 안창호의 논설을 중국신문에 게재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1932년 4월 29일 안창호의 체포 후에도 원동위원부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스스로 인격을 향상함과 동시에 경제적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고 경제운동, 특히 협동조합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언준의 활동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동아일보 상하이 . 난징 특파원으로 활약한 것이다. 이 6년 동안 그는 정력적으로 중국 문제를 보도하고 논평하였다.
동아일보 특파원 활동과 국제정세 인식
신언준은 대세, 즉 국제정세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치열한 기자정신을 가진 언론인이었다. “대세란 것은 궁핍한 명사 같지만 당도하면 불가항력을 가진 위대한 사실이다. 대세를 홀시하던 정치와 외교는 그 국가의 전도를 그릇되게 하며 국민의 이익을 희생시키니, 인류 역사상 그 본보기가 어찌 한둘에 그치랴.”
신언준은 특파원으로 상하이와 난징을 오가며 중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면서 재중 조선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재만 조선인은 “지식에 주리고 밥에 주린 문맹 궁민들”이었다. 그는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 조선 내에서 화교 박해로 번지자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히 연락하여 대책을 숙의하고 국민당 외교부장 왕쩡팅(王正廷)과의 특별면담도 성사시켜 그 사실을 보도했다. 임시정부는 만보산 사건 이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김구가 1931년 11월 임시정부 별동대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벌어진 이봉창 의사 의거에 대한 보도나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벌인 윤봉길 의사 의거 보도도 그가 담당했다.
신언준이 무엇보다 공을 들인 것은 독자들이 중국 문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여 한·중 합작의 지식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당시 “4억 3천 6백여 만의 복잡한 인구와 189만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포괄한 나라”(1930.3.5)였다. 그는 중국 문제를 중국 국내 정치세력 간 경쟁관계의 시각, 열강의 경제적·정치적 패권 싸움의 시각에서 관찰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환점으로 세계 역사는 ‘대서양시대’에서 ‘태평양시대’로 전환했다고 보았다. “전 세계 제국주의 왕좌의 기초는 태평양 일대에 있는 식민지”였으나 1929년 대공황 이후로 열강은 중국에서 균등한 세력유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라는 “통일 정권의 출현은 외국의 침략 세력을 근본적으로 복멸할 가공할 지진”이었다. 그리고 “동양의 국제적 대도시 상하이는 전 동양 내지 세계의 한 신경중추”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통일은 아직 불완전하고 취약했다. 중화민국의 전국 통일을 무색하게 한 것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도발이었고, 만주사변에 대해 장제스(蔣介石)는 ‘실력 배양주의’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한 괴물 홍군은 이미 중국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고 아시아의 문제,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신언준이 보기에 “중국 민중의 이익을 떠나서 일당 일파의 이익은 도리어 죄악일 것이다. 오늘 중국 대중의 유일한 큰 걱정거리는 빈곤과 무지”였다. 민중의 빈곤과 무지 속에서 신언준은 후스(胡適, 1891-1962)를 두고 “그가 생산한 문화재는 중국 민족 만대의 보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험난한 상황이라도 주체적 노력을 강조한 신언준의 논설도 한국 민족의 지적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