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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려인 디아스포라 80주년 시베리아 횡단기
  • 연민수 (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1937821일자 스탈린의 지령으로 연해주에 살던 한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172,000여 명의 고려인들은

912월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각지로 강제이주되었다. 올해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으로 72385일까지 세계한민족재단이 주관한 역사탐방에 학자, 언론인, 정치인, 공무원, 시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가하였다. 고려인은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다. 이들이 걸어온 삶의 자취를 찾아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도리이며 세계한민족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고려인 디아스포라 80주년 시베리아 횡단기시베리아 곳곳에 남은 고난의 흔적

우리의 첫 방문지는 강제이주의 출발지인 라스돌노예역이었다. 이 역이 있는 우수리스크에는 연해주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1864년 함경도 주민의 이주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새로운 삶을 위해 많은 한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한인들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들판을 황금물결로 바꾸어 놓았고,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톡 동쪽 해안에 인구 63,000명의 한인마을 신한촌을 세웠다. 특히 애국지사들의 항일 독립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 있도록 도운 최재형의 애국활동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스탈린은 한인들에게 일제를 위한 간첩행위 위험성 대비라는 명목으로 민족분산정책을 꾀함과 동시에 광활한 시베리아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하고자 강제이주를 추진하였다. 삶의 터전과 재산을 잃은 고려인들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지 블라디보스톡에서 도착지 카자흐스탄까지는 6,500km. 1평 남짓한 41실의 비좁은 침대칸에 몸을 실었다. 중간 기착지 2일을 제외하고 7일을 열차 안에서 보내야 하는 여정이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과 스텝지대의 광활한 초원과 구릉, 그 사이를 흐르는 냇물 등 눈앞의 풍경에 잠시 감상에 젖었다. 춥고 음산한 시베리아를 연상한 탓인가. 코스는 같았지만 강제이주 당시 40여 일간 짐짝처럼 실려 갔을 고려인을 생각하니 갑자기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탄 열차는 도중에 20~30분씩 정차하였다. 그중 울란우데역은 베이징에서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접경역이다. 징기스칸 시대에 몽골제국의 영토였다가 현재는 러시아 연방 브랴트자치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열차 탑승 4일째 되는 날 이르쿠츠크역에 내렸다. 이르쿠츠크는 동시베리아를 관할하는 도시로, 이곳에서 한인 지식인들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블라디보스톡에서 5,000km나 떨어져 있으면서 한인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때문이었다. 베를린올림픽의 손기정 선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이 도시를 흐르는 앙가라강변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추진했던 알렉산드르3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근처에는 시베리아에서 중국과 유럽으로 보내는 가스관 밸브를 조정하는 기관이 있어 그 위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바이칼호가 한눈에 보이는 산정에 올랐다. 다양한 수목 가운데 수령이 300년쯤 되어 보이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곳에서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는 평화제를 열었다. 육당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한민족의 시원과 관련해 바이칼 호수 브리아트족의 서낭당, 솟대, 고수레 풍습 등 민속신앙과 유사함을 지적한 바 있다.


고려인 디아스포라 80주년 시베리아 횡단기

   

다시 일어선 고려인의 불굴의 의지

다시 2일간 열차를 타고 내린 곳은 서시베리아의 수도 노보시비르스크였다. 인구 150만 명의 시베리아 문화, 교육의 중심도시다. 이곳에서 고려인의 정착지인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게 된다. 열차 탑승까지는 여유가 있어 식수와 먹거리를 산 후 2일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였다. 연해주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강제이주한 고려인의 첫 정착지이다. 열차에서 내리자 경쾌한 연주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현지 고려인들이 우리를 환영한 감동적인 전주곡이었다.


날이 밝자 고려인이 토굴을 파고 살았던 유지를 찾았다. 표지석에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109일부터 19384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다라고 적혀 있다. 바로 뒤 구릉에는 최초 정착한 고려인들의 공동묘역이 있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탄탄한 고려인 공동체를 만든 개척자들이 잠든 곳이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위령추모제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생존한 고려인 1세대를 비롯해 현지 시장 등 고려인 다수가 참석하였고, 지역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고려인 학교도 방문하여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 현황도 들었다. 1932년 연해주에서 창설된 고려극장은 이주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노래와 춤 공연을 관람하였다.


다시 6시간 버스를 타고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로 갔다. 인구 12만 명, 카자흐스탄 고려인 중 70%가 거주하는 고려인 문화 중심지로 한국어판 고려일보도 발행하는 곳이다. 시장에서 찬거리를 파는 고려인 아주머니가 맛을 보라며 건네주는 넉넉한 인심은 우리의 습속 그대로였다. 카자흐스탄국립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김게르만 교수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바로 고려인이라고 하였다. 낯선 땅에서 일구어낸 고려인 사회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전문 농업인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으며 국회의원, 교수, 과학자, 사업가, 예술인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난의 역사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자랑스러운 고려인이다. 한때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배웠고 소련 해체 후에는 해당 국가의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도 겪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88서울올림픽 이후 커졌으니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고려인이라는 동류의식이 정확할 것이다. 향후 교류와 협력을 통해 세계한민족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현지 다민족사회에서 주류로 살아가게 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