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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충절과 성리학의 표상, 포은 정몽주
  • 홍순석(강남대 국문과 교수, 포은학회 회장)

충절과 성리학의 표상, 포은 정몽주

 

포은 정몽주(1337-1392)가 활동하던 14세기는 동아시아의 대격동기였다. 원나라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대륙은 홍건적의 봉기와 한족 반란군의 할거로 내란상태였고, 일본 남북조의 분열과 쟁란에 편승한 왜구의 출몰로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송대의 성리학이 동아시아 보편적 유교 사상으로 등장했고, 그 영향력을 주변 국가에 확대해 갔다. 백여 년간 원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고려 왕조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발호로 국토는 유린되고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시기 포은은 문신이면서 관료로서의 행보를 전장(戰場)에서 시작하였다. 홍건적 침입 때 왕을 시종하여 안동으로 피신하였는가 하면, 왜구·여진의 토벌에 이성계와 함께 종군하는 장수의 면모까지 보였다. 전장에서 목도한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은 그의 정치관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 포은은 여러 차례 중국과 일본의 사행에 올라 외교관으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사신으로서 포은의 활동은 타협과 협상을 위주로 하는 외교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역시 전장에서 백성들의 곤궁한 처지를 절감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포은의 정치적 행보도 주로 백성들 편에서 실천되었다. 전제개혁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성계와의 만남, 반목, 그리고 죽음

포은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시기는 공양왕 때이다.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추대에 이성계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결별하면서 고려 왕조의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던 시기다. 포은은 내정개혁의 측면에서 정도전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역성혁명에 반대했다는 관점에서 이색과 정치적 입장이 같았기 때문에 양자 어느 편에도 완전히 포함시킬 수 없다.

     

포은은 친원세력의 견제에 있어 이성계 세력과 함께 하였으나, 고려 왕조의 존립을 위해 이성계 세력과 반목과 견제를 계속하며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른바 윤이·이초의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의 고려 부정과 신왕조 개창 의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자, 포은은 우창당인물의 사면을 건의하고, 구세력과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은은 고려 왕조를 존속시키려는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포은과 이성계로 대표되는 양 세력은 고려 왕조의 존립과 역성혁명을 둘러싸고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드러냈다. 포은은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1392(공양왕 4) 3, 김진양 등에 의해 먼 지방으로 유배되어 와해될 기로에 처한 이성계 세력은 4월 이방원의 주도 아래 선죽교에서 포은을 격살하였다. 포은을 제거함으로써 신왕조 개창을 위한 최대의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이어서 정몽주당의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포은의 피살이 곧 고려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포은 사상의 핵심을 절의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성리학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것은 의리와 명분에 토대한 성리학적 정통론이 정착되는 상황에서 절의지사 또는 충신으로서의 평가가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힘입어 세종 때 찬진된 삼강행실도충신전에 올랐고, 문종 때는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사대교린에 입각한 대외관과 가묘·오부학당·향교·의창의 설치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한 업적으로 평가되었고, 그 결과 1510(중종 5) 문묘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론(道統論)으로 완성되면서 급기야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되었다.

     

조선 후기 당파의 혼란기에도 포은에 대한 배려에는 반론이 없었다. 특히 송시열은 포은의 현양사업에 총력을 기울였고, 뒤이어 이재 역시 포은의 절의를 현양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숭양서원, 충렬서원, 임고서원의 창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역신에서 충신으로 재평가되다

포은은 조선 건국 초기 역신·간신에 불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포은을 선죽교에서 격살케 한 태종에 의해 신원되고 충신으로 재평가되었다. 신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왕권 강화와 이를 뒷받침할 신료들의 충절·의리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포은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관 춘추관사 익양부원군에 증직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포은에 대한 평가는 다시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확대되었다. 포은으로부터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론의 인식은 16세기말 사림들에 의해 확고해졌다. 후대에 송시열, 이재를 주축으로 추진된 포은 현양사업은 그를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각인해 주었다.

     

유성룡은 포은을 평가하여 나라가 존립하고 있을 때에는 포은도 함께 존립했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포은도 함께 생명을 바쳤다고 하면서, 포은이 고려조와 존망을 함께 하였으며 정명(正名)사상을 바탕으로 유학적 이상 세계를 이루고자 하였던 인물이라 했다. ‘정명이란 명분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모든 국가 구성원이 자기의 본분과 의무와 권리를 다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몸가짐을 하는 것을 뜻한다. 선비의 나라를 자처했던 조선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가치 정명’. 즉 조선 건국의 명분을 확립해야 할 이유와, 조선을 위한 충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바로 포은이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다시 각광받은 이유다. 포은의 이러한 생각은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절대시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개성의 선죽교와 <단심가>가 또렷이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