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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정호와 지도,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던 작품 -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을 보다 -
  • 이기봉(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

김정호와 지도,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던 작품

 

조선의 위대한 지도 제작자 김정호를 그린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지난 9월 개봉했다. 아쉽게도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2016년 대한민국 관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영화가 이룬 성취를 꼽으라면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연속된 풍경, 그리고 김정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시작부터 역사적 사실과 어긋났던 영화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황해도 토산현에서 군인들을 모아 평안도 정주로 보낸다. 그들은 관에 보관되어 있던 그림식 고을 지도를 들고 춥고 험한 첩첩산중의 산길을 헤매다 결국 길을 잃고 모두 얼어 죽는데, 여기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조선이란 나라는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약 330개의 고을과 수많은 군사기지를 연결하는 그물망 같은 길 위에 30리마다 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그리고 10개 안팎의 역을 하나로 묶은 후 종6품의 찰방(察訪)을 파견하여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국영숙박시설인 원()을 역보다 더 조밀하게 설치·운영했으며, 민간의 술막(酒幕) 또한 고개·나루 등 주요 지점에 수없이 들어서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이익을 취하였다. 따라서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처럼 먼 길을 가더라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하나의 근본적 오류는 지도를 갖고 다니며 길을 찾았을 것이라는 설정인데, 조선시대에는 정리표(程里表)’라는 길 안내 책이 따로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고을과 주요 군사기지를 잇는 모든 길과 고개, 나루, 하천, 역원 등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지점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기 쉽게 표 형식으로 정리해 놓은 것인데, 갖고 다니기에 딱 알맞은 크기와 부피로 만들어진 이 정리표만 있으면, 사실상 먼 길을 오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평생에 걸쳐 다양한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일생에 대해서도 깊은 오해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김정호하면 대동여지도를 떠올리지만 목판본 22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그의 대표적 작품일 뿐, 김정호는 20세 안팎부터 엄청나게 많은 지도와 지리지의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먼저 지도 차원에서만 말하면, 모두 연결했을 때 남북 6.6m에 이르는 거대한 대동여지도의 크기와 거의 비슷하면서 형식과 내용이 다른 대축척 지도책을 최소 열 종류나 만들었다. 또한 낱장의 중형 지도도 서울지도 한 종류, 조선전도 세 종류, 세계지도 한 종류를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나라의 전국 지리지도 5종이나 편찬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30살 안팎에 동여편고(東輿便考)2, 40살 안팎에 동여도지(東輿圖志)20책과 또 다른 동여도지3, 50살 안팎에 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輿圖備志)20책을 편찬하고, 60살 안팎에 그의 마지막 지리지 작품 대동지지(大東地志)15책을 저술하다가 1866년경 일부를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김정호가 편찬한 이렇게 많은 지도와 지리지가 영화 속에서는 목판본 22첩의 대동여지도만 남은 채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가 김정호의 삶과 꿈, 고민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 또한 이 때문에 연쇄적으로 나타난 시나리오가 바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의 제작에 필요한 지리 정보를 확보하고자 평생 전국을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오르내렸다는 묘사인데, 이 또한 사실과는 다르다.

     

자신이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재편찬한 대동여지도

김정호가 40대 중반쯤 만든 청구도를 포함해 초기의 대축척 지도책 여섯 종류에 그려진 우리나라 산줄기와 물줄기, 해안선의 모습은 1770(영조 46) 임금의 명을 받아 신경준이 제작한 지도 계통과 동일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정호가 지도의 기본 내용에서 신경준의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인데, 그가 직접 쓴 청구도범례에도 그런 사실을 당당하게 적어놓았다.

     

김정호는 50살 무렵 만들기 시작한 두 번째 대동여지도부터 지도의 기본적인 내용까지 바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목판본의 22대동여지도에 이르러 큰 틀은 비슷하더라도 세부 내용은 완벽하게 바꾼 모습을 그려낸다. 이것은 김정호가 30년 이상 지리지를 편찬하면서 갖게 된 자신감의 결과인데, 그의 지리지 속 어떤 정보도 그가 직접 돌아다니며 찾거나 측량하여 만들어진 것은 없다. 모두 그가 확보한 수많은 기존 지도와 지리지에 있는 정보를 비교·검토하여 스스로 다시 판단한 결과를 담았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대다수가 잘못 알고 있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만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 필요한 전국 고을지리지와 지도책 편찬 능력에 있어 조선은 근대 이전의 전통 문명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둘째, 지금 우리가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지도와 지리지 대부분은 조선 후기 양반 지식인이 재력만 있다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이었지, 결코 국가만의 전유물이었던 적은 없었다. 따라서 김정호가 조선이란 국가에서 편찬한 최고 수준의 지도와 지리지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는 김정호가 처한 시대적 현실이나 상황, 김정호가 제작한 수많은 지도 등의 모습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