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아관파천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일반 정서, 러시아 정부의 개입 정도, 아관파천의 경위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고종으로 하여금 아관파천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고종폐위설’의 진위, 배후 등을 파악해야 한다.
아관파천의 배경
춘생문 사건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김홍집 내각은 개혁을 급속하게 시행하였다. 특히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강행하여 전국적인 반발을 초래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을미사변 이후 봉기한 의병이 더욱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러한 지방의 불안으로 각종 생활용품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1896년 1월 서울에서는 심각하게 물가가 올라 불안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2월 7일, 을미사변의 배후인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등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는 국내의 반일 감정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에 체류하던 구미 외국인들의 반일 감정도 악화되고 있었다. 김홍집 내각을 등에 업고 일본이 각종 이권을 독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일 정서를 바탕으로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구미 각국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춘생문 사건의 실패로 궁내부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미국과 러시아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조선 내정 불간섭 방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공사관은 고종의 도움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결심하였다.
아관파천의 계획
고종은 1896년 1월 중순, 혹은 그 이전부터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구체적으로 타진하였다. 고종은 1월 9일 이범진을 통해 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ебер)와 현 주한 러시아공사 쉬뻬이에르(Α.Н. шпейер)에게 “자신은 러시아로부터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 고종은 이 편지에서 “일본이 왕세자조차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의 왕자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려 한다”고 알렸다. 또한 고종은 일본이 1월 말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계획하는 것에 대해 주한 러시아공사가 강력히 반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 러시아공사 쉬뻬이에르는 2월 1일 러시아 함장 몰라스(Пётр Молас)와 함께 고종을 접견하였다. 쉬뻬이에르는 1896년 2월 1일 태평양함대사령관 해군중장 알렉세예프(Е.И. Алексеев)에게 “고종이 폭동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제물포로 러시아 함정을 신속히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쉬뻬이에르는 2월 1일 로바노프에게 “저는 모든 경우를 대비해서 제물포로 러시아 함정을 신속히 파견해 줄 것을 알렉세예프에게 요청하였다”고 알렸다.
고종은 2월 2일 이범진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왕세자와 같이 왕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피신하려고 한다”고 비밀 편지를 보냈다. 당시 베베르와 쉬뻬이에르는 이범진에게 고종 피신의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이범진은 “만약 베베르와 쉬뻬이에르가 고종의 피신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고종이 대궐에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라며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심하였다고 답변하였다. 쉬뻬이에르는 2월 2일 외무대신 로바노프에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는 의사를 밝혔다”며 신속한 답변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2월 7일 밤 쉬뻬이에르에게 “모든 준비를 마쳤고, 2월 9일 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예정이다”고 알렸다. 하지만 고종은 예정된 2월 9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러시아공사관을 수비하는 수비병의 인원이 매우 부족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쉬뻬이에르에게 자신의 완전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 수비병의 인원을 대폭 늘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쉬뻬이에르는 고종의 요청을 고려하여 제물포에 정박한 아드미랄 꼬르닐로프(Αдмирал Корнилов)의 함장 몰라스(Пётр Молас)에게 제물포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수비병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쉬뻬이에르는 2월 6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함장 몰라스에게 대규모의 무장 해병을 신속히 파견할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순양함 아드미랄 꼬르닐로프는 당시 제물포에 포함 보브르(Бобр)와 함께 정박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가 아관파천을 사전에 승인했는가 검토하면, 기존 국외 연구는 러시아 정부가 고종의 아관파천을 사전에 승인했고, 니꼴라이 2세의 동의에 따라 제물포로 특별히 함정이 파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국내 연구도 아관파천을 성사시키기 위해 러시아 정부에서 군함 1척을 파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군함은 아드미랄 꼬르닐로프호였다. 그러나 아드미랄 꼬르닐로프의 병력이 아관파천을 위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러시아 정부의 ‘사전 승인’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각국 공사관은 자국 공사관을 보호하고 외교행랑을 운반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군함을 정박시켰고, 아드미랄 꼬르닐로프도 아관파천을 위해 ‘특별히’ 파견된 군함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군함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정부와 주한 러시아공사관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아관파천 전후 약 한달 간 전신이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1주일 전 쉬뻬이에르는 러시아 정부에 아관파천 계획을 타전(打電)했으나 아무런 답신도 받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러시아 정부는 아관파천에 대해 사전 승인 혹은 반대의 입장을 러시아공사관에 전달하지 못하였고,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받아들인 것은 쉬뻬이에르의 판단과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결국 고종은 늦어도 1월 중순부터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고려했으며, 러시아 측 파트너가 쉬뻬이에르였음을 알 수 있다.
아관파천의 실행
대위 흐멜레프(Сергей Хмелев)는 서울로 파견되는 해병 상륙부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함장 몰라스는 2월 9일 저녁 7시 30분 제물포 연안에 상륙할 것, 2월 10일 새벽 6시까지 서울의 서대문에 도착할 것 등을 흐멜레프에게 명령하였다. 특히 몰라스는 서울로 향하는 도중 한국인을 만나면 친절하게 행동할 것, 일본인을 만나면 절대로 신중히 대응하면서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등을 지시하였다. 상륙부대와 함께 소위 지야꼬노프(Владимир Дьяконов)는 보급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수송부대를 지휘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서 파견된 미하일로프(Михайлов)는 서대문에 도착해서 대위 흐멜레프를 비롯한 해병부대를 맞이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인도하였다.
2월 10일 제물포에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장교는 3명이었고, 순양함 아드미랄 꼬르닐로프에서 100명, 그리고 포함 보브르에서 32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장교를 포함한 러시아 해병의 전체 인원은 135명이었고, 포함 보브르에서 1대의 대포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송되었다. 결국 러시아공사관을 수비하는 전체 병력은 장교 5명, 해병 135명, 카작인 군인 4명이었다. 이범진은 러시아공사관의 수비가 강화되자 2월 11일 새벽, 러시아공사관에 고종이 피신할 것이라고 쉬뻬이에르에게 알렸다. 이러한 최종적인 준비과정을 통해 고종과 왕세자는 새벽에 가마를 타고 영추문(迎秋門)→금천교(禁川橋)→내수사앞길(內需司前路)→새문고개를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수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나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고, 이윤용은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대략 800명의 경찰이 있었는데, 경찰의 대표는 새로운 권력의 변동 상황에서 고종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그날 저녁 러시아공사관과 영사관 사이의 광장에는 청색의 천막이 설치되었고, 1중대가 러시아공사관의 안팎에서 경계를 시작하였다.
고종폐위설의 배경
‘고종폐위설’이란 아관파천 직전 김홍집 내각이 고종의 폐위를 도모하였다는 음모를 의미한다. 고종은 이러한 음모 때문에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고 ‘윤음(綸音)’에서 밝혔다. ‘고종폐위설’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 데 있어 결정적 계기였고, 아관파천의 핵심인물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결심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신변 안전에 대한 보장, 왕이 외국공사관에 피신하였다는 정치적 부담감, 아관파천에 따른 민심의 동요 등이다. 고종은 애초 2월 9일 파천(播遷)을 결심했지만 자신의 신변 안전 등이 해결되지 않자 실행하지 않았다. 고종의 파천의사를 확인한 정치세력은 아관파천에 따른 고종의 신변 안전과 정치적 부담감 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이들은 2월 9일 쉬뻬이에르를 통해 러시아공사관의 수비병 증원을 약속받아 고종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궁내부 전선사장(典膳司長) 김명제(金明濟)를 엄상궁(嚴尙宮)에게 보내 “각 대신 등이 일본군과 공모하여 음으로 불궤(不軌)를 도모하고 방금 입궐해서 국왕을 폐하려고 한다”는 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총애했고, 엄상궁은 러시아공사관에 물품을 보내는 등 러시아공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이범진은 아관파천 직전 엄상궁에게 김명제를 보내 고종이 폐위되면 그녀의 신변도 위협받게 될 것이라며 설득하였다. 이러한 서신은 아관파천에 따른 고종의 정치적 부담감을 어느 정도 해소할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범진은 규장각 각감(閣監) 이기동(李基東)을 통해 사촌 누이동생인 이상궁(李尙宮)을 설득하여, 춘생문 사건 당시 실패했던 가마를 이용한 파천 방법을 추진하였다. 이상궁과의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이기동은 이상궁이 대궐로 들어갈 때 가마를 호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기동과 이상궁은 대궐을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고, 대궐 수비대의 경계를 늦출 수 있었다.
궁내부에 정치세력을 형성한 이범진은 가마를 통한 파천(播遷) 방법, 공병대와 러시아수비병의 동원 등을 담당하였다. 춘생문 사건에 참여한 이완용과 윤치호는 조선 주재 외교관의 승인과 지지를 위해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박정양은 민심의 안정을 위해 각종 지시문을 발표하는 한편 보부상의 동원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궁내부에 기반한 이범진 계열이 아관파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만들어진 독립협회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아관파천 성공을 위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