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 역사적 관계, 그리고 군사안보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탈냉전기 이후에도 협력보다는 오히려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탈냉전을 거치면서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유럽 공통의 외교안보정책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로 평화구조가 제도화되고 공동체가 확고하게 수립된 반면, 동아시아는 왜 갈등과 경쟁의 질서 속에 머무르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대한 논의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연구를 기획하였다.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군사안보적, 경제적, 사회·문화·역사적 관점에서 분산적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가운데 이루어져 왔다. 즉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아세안지역포럼(ARF)과 아태안보협력이사회(CSCAP), 동북아협력대화(NEACD) 등의 다자 대화 채널을 통한 협력방안 제시에 머물렀고, 경제적 관점에서는 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포럼(APEC)과 아세안+3(ASEAN+3) 조직을 중심으로 국가 간의 경제적 협력을 증대시키는 정책대안 제시에 머물렀다. 또 사회·문화·역사적 관점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유사한 정체성은 발전시키되 서로 상이한 사회적 배경· 문화·언어·역사 등은 교류와 협력을 통해 통합을 이루자는 방안들을 제시하는 데 머물렀다.
평화 체제 진전을 위한 '소프트파워' 접근
그러나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기획연구서 《동아시아 공동체의 설립과 평화구축》은 필자를 비롯한 관련 전문가들이 2년 간 연구를 수행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실질적인 공동체를 설립하여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책은 기존에 접근하지 않았던 영토문제가 발생한 이유와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 안보 및 경제공동체의 통합적 이론과 정책, 그리고 소프트파워 접근을 통하여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과 평화체제를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이슈를 다루고 있다. 제1부는 필자의 책임 하에 경희대 홍기준 교수, 국방대 이상수 박사, 이규원 소령이 '동아시아 영토문제 극복을 통한 평화공동체 추진방안'이란 주제를 연구하였다. 여기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 첨예한 영토분쟁, 즉 중·일 간의 센카쿠 열도 분쟁, 러·일 간의 쿠릴열도 분쟁, 남중국해 영토분쟁, 그리고 분쟁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느 일방이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는 한·일 간 독도문제, 한·중 간의 이어도 문제 등의 원인분석과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아세안지역포럼(ARF)이라는 지역기구와 연결시켜 연구하였다.
국가의 주권문제인 영토분쟁에 대한 상호 이해와 접근 없이 평화공동체를 논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영토문제에 대한 다자주의적 해결 방식과 규범을 먼저 세우고 아세안지역포럼(ARF)을 모태조직으로 하여 다자간 안보협력기구의 설립을 도모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아세안지역포럼(ARF)을 동아시아 다자간 안보기구로 만들기에는 장기간이 소요되므로 분위기조성기, 협력확대기, 협력심화기로 기간을 구분하여 단계적인 추진방안을 현실성 있게 제시했다.
제2부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조철호 연구교수의 책임 아래 세종연구소 엄상윤 박사, 고려대학교 이정남 박사, 상상연구소 김수현 박사, 인천대학교 김지환 교수, 창원대 이기완 교수가 '21세기 한·중·일의 동아시아 안보·경제공동체의 이론과 정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국, 중국, 일본이 각각 갖고 있는 동아시아 안보와 경제공동체 구상에 대하여 기존 이론과 정책을 검토·분석한 후 건설적인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 연구는 일관된 공동연구를 위하여 각자 제안배경과 목적, 이론적 준거, 실현방법, 실현 가능성 및 전망 등으로 구성된 분석틀을 중심으로 기존 연구들을 망라한 창의적인 안보 및 경제적 공동체 설립 방안을 담고 있다.
제3부는 연세대학교 손열 교수의 책임 아래 서울대 김상배, 전재성 교수와 중앙대 이승주 교수, 그리고 한림대 최태욱 교수가 참여하여 "동아시아 공생을 위한 소프트파워 전략"을 주제로 소프트파워에 기반한 한국의 동아시아 공동체 전략을 모색했다. 상대방을 특정 공동체에 끌어들이는 작업은 강제력에 의한 동원이 아닌 그들의 마음을 사는 동의(consent)의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면서, 지역주의를 추동할 수 있는 비결은 소프트파워적 접근에 있다고 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동아시아에 통용될 수 있는 한국의 소프트파워 자원들을 발굴했다. 한국적 소프트파워 자원과 매력은 경제개발, 통상, IT정보화, 비제국주의적 중재자 역할에 있으며, 한국이 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소프트파워 외교를 펼쳐 나갈 것을 제시했다.
동아시아 시민들의 인식 변화를 위한 연구를
동아시아 공동체 설립과 평화구축은 매우 힘든 과제이고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관련 국가들 간의 진정한 협력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공동체를 이룬 경험이 없으며, 현재도 동아시아에서는 구조적, 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유럽연합과 같이 정치·군사·사회·경제·문화를 포괄하는 공동체가 형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설립과 평화구축의 과제는 한순간에 정치지도자들이 결단을 한다거나 선언을 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느 한 국가가 주도적으로 공동체 설립을 견인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설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관건은 동아시아 전체 사회와 시민들의 인식 변화에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이 주도적으로 관련 연구들을 수행하여야 하며, 그 연구들의 결과를 동아시아 사회에서 발표하고, 영어, 중국어, 일어 등 관련국들의 언어로 번역된 책을 출판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의 전문가층, 시민단체, 정부들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토문제와 안보 및 경제적 이론과 정책, 그리고 소프트파워 접근을 통해 실질적인 평화공동체 설립 방안을 담은 이 책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견인할 지적 기반으로 널리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