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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일관계,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다"
  • 이윤정 | 사진_ 송호철

지난해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일 지식인들이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처음으로 양국의 지식인들이 함께한 이 선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지금도 이와 관련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의 조약에 대해 연구한 이상찬 교수를 만나 그 당시 조약들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_ 편집자 주

이상찬 교수

규장각에서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 조약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처음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한국 근대사 전공자인 만큼 제국주의침략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계기로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규장각 학예연구사로 일할 당시 《규장각자료총서 근대법령자료집》을 간행하게 됐는데 그때, 고종과 순종의 수결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문득 고종의 퇴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일본인들이 고종의 수결을 위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고종의 퇴위부터 역추적을 하기 시작했고, 고종 퇴위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을사조약의 원본자료를 찾아봤는데 역시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때부터 원본자료의 중요성에 주목했고 조약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근대 조약 연구와 관련해서 규장각에는 주로 어떤 나라와 체결한 조약들이 남아 있고, 그 외에는 어떤 자료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느 나라라고 할 것도 없이 1876년부터 1910년 사이에 체결된 조약들은 모두 남아 있다. 조약뿐 아니라 통상조약으로 외교관계가 성립된 나라들과 주고받은 외교문서도 모두 소장돼 있다. 그중에는 중국·미국·일본·러시아·영국과 같은 나라는 물론 덴마크, 이탈리아 등과 같은 나라들과의 외교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이런 조약류와 외교문서는 규장각 원래 자료들과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근대외교문서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조약 체결과정에 대한 역사분야에서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그동안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사업과 같은 대외관계사 연구가 나름대로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약 체결과정의 기초 내용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조약체결 과정은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부분 못지않게 배경이라든가 특수한 목적과 같은 여러 가지 연구할 소재들이 많이 있다. 나라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사실 심화된 차원의 연구는 더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연구자가 관심과 연구를 심화시키겠다는 자세와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상찬 교수

일본이 조선과의 조약 체결 초기에는 합법적인 절차를 매우 중시하다가, 이후 노골적으로 불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고 하는데, 조약 체결 초기에 일본이 합법적인 절차를 중시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사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갔다고 볼 수 없다. 그 시기에는 일본도 다른 한편으로 자기들이 강요받았던 불평등조약에 대한 개정운동을 하는 단계였다. 그러니 조선을 침략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은 강대국 대열에는 아직 끼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제법질서를 깨겠다는 생각은 차마 못했다. 하지만 1894년이 지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월한 입장이 됐다. 또, 영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이 이미 일본이 조선을 독점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형식적인 조약만 필요할 뿐 조선의 동의가 표시된 합법적인 절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측 병합조약의 원본 문서도 일본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1904년부터 1910년까지 4개의 조약 즉,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 정미조약(1907년 7월 24일), 한일병합조약(1910년 8월 29일)이 체결된다. 이 조약들은 사실 문제가 많은 것이지만, 각각의 나라에서 작성했다는 증거가 명백하다. 종이, 글씨체, 제본방식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한일병합조약은 지질, 흰 비단을 찢어서 한 제본, 조약서를 묶은 뒤 봉인한 방식까지 똑같다. 글씨체는 필적감정을 할 필요도 없이 비전문가가 봐도 똑같다. 결정적인 것은 봉인인데 일본어본 조약은 철저하게 봉인을 한 반면 조선은 그때까지 봉인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흔적들이 일본측이 문서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병합조약의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을 모두 일본이 만들었다는 것의 법적 의미는 무엇인가?

국제법상 조약은 관련 당사국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신사적으로 체결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당사국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체결하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약에 쓰는 문구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중요하다. 자국어로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등한 관계로 자유의사에 따라 합의를 해서 체결을 하게 되면 그 조약문을 각자 자국어로 작성해 의미를 분명히 해야 내용에 대한 신빙성도 보장할 수 있다. 그래서 양국이 각각 문서를 작성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내용은 우리가 다 만들었으니 너희는 도장만 찍어라"라고 해서 도장만 찍었다고 그 조약이 유효하게 된다면 대등한 관계나 자유의사와 같은 개념은 모두 무시가 되는 것이다.

일제의 불법 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약 자체의 무효'와 '불성립으로 인한 효력 불발생'은 무엇이 다른가?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다. '조약 자체의 무효를 주장한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흔히 '조약 자체가 무효다', '원천적으로 무효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건 사실 불성립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무효, 유효를 가를 땐 일단 조약이 성립되었나, 성립되지 않았나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조약이 성립되지 않았을 경우 당연히 효력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불성립으로 인한 효력 불발생'이라는 표현이 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찬 교수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이 '불성립으로 인한 효력 불발생'으로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우리가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면 큰 변화가 생길 것이다. 만약에 일본 정부에게 '불성립으로 인한 효력 불발생'을 증명할 수 있고, 일본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배상을 요구할 수가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 그룹이 실질적으로 '불성립으로 인한 효력 불발생' 입장을 이해하면서 지금이라도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권을 상실하게 만든 근대의 조약들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반성하기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조약의 내용을 보면 제국주의 침략의 직접적 증거들이 그대로 담겨있는데 침략을 당한 입장에서 그걸 보고 어떤 교훈을 얻나? 우리가 힘이 약해서 당했으니 힘을 기르자? 그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그동안 연구해 온 내용들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강의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전공수업을 통해서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교양수업시간에 조약서의 이미지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곧바로 시작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지 못하다. 또한 이제는 국가, 민족, 집단, 우리와 관련된 가치만 중요한 시대는 갔다. 한 사람, 행복, 인권, 삶의 질 향상과 같은 개인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논의할 때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역사문제도 '나라는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그런 부분까지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구 분야와 관련해 앞으로 재단에게 바라는 점은?

식민지문제를 정리하고 민족의 공동이익을 찾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력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문제라서 아직도 학회 차원이나 연구자 차원에서 해결하기에는 벅차다. 따라서 북한과의 협력문제도 동북아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하며 재단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과도 더욱 새롭고 건설적인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 청산과 함께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 역시 재단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이상찬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편집이사,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규장각 소장 고종시대 공문서 시·개정 목록》(2009), 《근대한국외교문서》(2009),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2008), 《길은 사이에 있다 : 역사의 창으로 본 우리의 현재와 미래》(2000), 《경기문화재대관 (경기도편)》(1998), 《한말 의병관계문헌 해제집-대우학술총서 자료집 6》(199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