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지난해 12월 17, 18일 재단 11층 대회의실에서 "동아시아 평화와 초국경 협력"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2009년 6월, 11월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서는 북한과 중국 변경 등 국경을 넘는 초국경 공간에서의 협력에 대한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
학술회의는 권병현 전 주중대사의 동아시아 평화와 한중관계에 대한 기조발언과 20여 명의 한중 학자가 초국경 협력에 대한 이론 문제, 중국 동북지방의 현황, 북한과 중국 변경에서 협력방안과 정책 과제에 대한 발표, 토론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 동아시아에 관한 담론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해 왔고, 최근에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담론은 아직 실제 내용이 없고, 실천이라는 부분에서 논리의 추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점에 유념하여 탈냉전과 세계화 이후 협력과 성장의 '생장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변경에서의 협력을 중심 주제로 삼아 동아시아 평화 논의에서 구체성과 실천성을 확보해 나가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중간 역사갈등의 배경공간이 되어온 중국의 동북지방이라는 전략공간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더욱이 북한을 둘러싼 불안요소가 커지면서 이 지역은 우리 역사전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주목받는 조선족 사회의 성장과 역할
이전 두 차례 회의에서 초국경 협력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리고 중국의 변경협력 실제와 정책을 집중적으로 탐색하였다면, 이번 회의는 이전 회의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변경 지역의 성장과 기업의 역할, 남북한-중국 간의 농업협력에 관한 주제 등을 중심으로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규영 교수는 발표문에서 유럽 역내 국가들의 국가 중심 시각을 초월한, 평화를 향한 역사적 실험을 초국가, 국가, 시민의 다양한 입장에서 분석하고 동아시아에 주는 시사점과 한계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여러 평가가 있지만 유럽의 경험이 공생모델을 찾고 있는 동북아에 타산지석의 교훈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교수의 글은 변경문제를 보는 시각을 넓히고 비교의 기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규영 교수의 발표내용은 소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초국경 협력을 소개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아우른 이동률 교수의 글과 함께 경계와 폐쇄의 공간에서 협력과 소통의 공간으로 바뀌어가는 변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을 제공하였다.
한편 길림대 이바오중(衣保中) 교수는 관심사가 되고 있는 중국 두만강 개발과정에서 조선족 사회의 역할에 눈길을 주고 있다. 조선족 사회가 두만강 지역의 안정과 발전의 초석으로, 두만강 개발과 동북아 협력을 이끄는 동력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조선족이 변두리 문화의 열세를 융합문화의 특성으로 승화시켜 가면서 '주체성'과 '개방성'을 입증해 보여줄 수 있고, 이것들이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유용한 자산임을 역설하고 있다. 최근 조선족 해체론 등의 위기론이 유포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할 만하다.
이밖에도 이번 학술회의의 특화주제인 변경의 농업협력에 관한 논문 발표도 있었다. 요녕대학의 진잉(金潁) 교수는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인 보급한 동북지역의 수전 농업이 조선족 사회 형성의 경제적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 농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정리, 소개하였다. 한중간 협력 역사에 대한 이 발표는 상호 공생과 윈-윈의 역사가 이 공간에서 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요동학원 만하이펑(滿海峰) 교수는 요녕성의 변경개발계획과 관련하여 정책적 기회와 시장적 수요가 이 지역에서 초국경협력을 위한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만교수는 이런 기회를 선용할 경우 생태형·창조형·레저형·체험형 휴양관광단지를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산업은행의 추원서 박사는 초국경 협력을 통한 녹색성장과 기업역할을 설명하면서 한국과 중국이 녹색성장을 협력 아이템으로 공유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농촌경제연구원 김영훈 박사는 남북한 농업협력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장기적으로 북한이 외부세계와 소통·거래하는 농업부문에서도 '개성공단'과 같은 지역을 변경에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진화린(金華林) 교수와 요녕대학 장동밍(張東明) 교수는 동북진흥 전략과 한중 기업협력, 북중 경제무역관계에 관한 논문을 통해 북중변경에서 한중 협력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환기하였다.
삭막한 역사의 기억 넘어 공생과 협력을 향한 의지
이번 학술회의는 북한·중국 변경 지역에서 남북한과 중국의 협력 체제가 가능하고, 한중 양국 지식인들이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비전을 만드는 '인식공동체'(epistemic community)를 구축할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특히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한중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지역 평화와 협력에 대한 대안적 개념과 새로운 비전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이번 회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재단은 이번 학술회의가 "역사갈등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닦는다"는 재단의 설립 취지에 부응하고, 동아시아공동체 구성을 위한 실천적 방법론과 프로그램을 모색해 나가는 포럼으로 정착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가 깨졌을 때 동아시아의 안정이 온전히 지켜질 수 없다는 상막한 역사의 기억을 되짚으며 공생과 협력의 역사를 위한 의지를 변경에서 확인한 것, 그것이 이번 학술회의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