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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청·일 전쟁과 연평도 사태
  • 김희곤 안동대 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김희곤 안동대 교수

지난해 11월 23일 연평도가 폭격당했다. 50년 넘게 유지되던 북방한계선(NLL)을 이제 와서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선 북한의 도발도 문제려니와, 제대로 보복 못한 쪽도 우습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주먹은 치고받을수록 강해진다. 전쟁으로 가는 길이 대개 그렇다. 천안함 피격만 하더라도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는데, 이제는 아예 영토까지 공격하였다.

여기서 말하려는 초점은 북한의 불법 도발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반응이다. 연평도 피격 이후 한 달 가까이나 지나서, 앞서 북한 도발로 마치지 못한 포격훈련을 마무리 짓겠다고 한국 정부가 나섰을 때, 주변 국가의 대응은 참으로 놀라웠다. 중국은 '긴급특사'라는 이름을 붙여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보내, 막무가내로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언론은 이를 간섭과 압력이라고 평했다. 러시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부장은 모스크바를 찾아든 북한 대표의 귀엣말을 듣고서는, 두 팔을 내두르면서 한국의 포격 훈련을 그만두라고 외쳐댔다. 두들겨 팬 쪽에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맞아서 다친 사람에게는 말리면서 두 팔까지 감아쥐려 나섰다. 말리는 것이 아니라, 행패부린 쪽을 편든 셈이다. 일본에서는 더 야단이었다. 한반도에서 실제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도한 언론도 있을 지경이다. 정작 한국은 조용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정부의 방침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중국정부의 북한 견제가 미흡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100년 전 성환전투 현장을 생각하다

이런 정황은 낯설지 않다. 이미 백 여 년 앞서 벌어진 장면을 돌려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날을 되짚어 보려고 학회 답사에 나섰다. 청과 일본이 마주쳤던 성환전투 현장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성천이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천안시 성환, 소사벌이 펼쳐져 있다. 제방 북쪽에서 일본군이 전쟁을 시작한 시점은 1894년 6월 27일(양력 7.29) 새벽 0시, 서울에서 사흘 밤낮을 빠르게 걸어 온 뒤, 잠시 숨을 고르자마자 공격에 나선 길이었다.

청군은 동학농민군을 누른다면서 이미 아산만에 상륙하여 성환과 천안에 포진하였다. 일부 병력이 이미 호남지역을 훑어 오기도 했다. 2천 병력을 거느린 서스청(攝士成)이 성환에 터를 잡고, 총사령관 예치차오(葉志超)는 1천 병력으로 천안에서 뒤를 받쳤다. 청군이 빠져나갈 길인 아산만은 이미 막힌 상태였다. 나흘 전 6월 23일 일본해군이 청군전함과 수송선단을 붕괴시켜 버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풍도해전이다.

새벽 0시 일본군은 장마로 물이 불어난 안성천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청군 서쪽이 뚫리기 시작하고, 동쪽 방주산 방어선이 밀린 끝에, 본진이 버티던 팔봉산마저 무너졌다. 겨우 한나절 남짓한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다. 3백 년 전 정유재란 때 명군이 왜군을 물리치던 바로 그곳에서, 이번에는 일본군이 이겼다.

이제는 평양전투 차례다. 서로가 1만 6천 병력으로 대등한 규모이니, 지키는 부대가 유리했다. 8월 16일(양 9.15)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최고사령관 예치차오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다. 부장들이 사령관의 항복을 막으려고 감시해가면서 용전하였지만, 끝내 패했다. 이틀 뒤 서해(황해)해전에서 청군이 다시 크게 졌다. 일본군은 따렌과 뤼순을 점령한 뒤 대학살극을 벌이고, 랴오뚱반도를 쳐 올라갔다. 그 해 겨울 청군은 참담한 패배를 거듭하였고, 이듬해 1월 8일(양 2.2) 웨이하이웨이 북양함대가 궤멸당했다. 딩루창(丁汝昌)은 항복하고 자살했다. 전쟁은 계속되어 랴오뚱반도 북부에서도 청군이 거듭 크게 졌다. 청군의 최후 저항선이 무너지고 3월 23일(양 4.17)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자국의 3년치 국가예산에 맞먹는 배상금을 챙기고 대만을 손에 쥐고 대만총독부를 세웠다.

성환전투와 평양전투는 조선 백성들에게 중국을 바라보는 눈을 고쳐 뜨게 만들었다. 누구나 청군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발하는 일본군이나 수비하는 청군도 그랬고, 조선 정부나 유림, 백성들이 모두 그랬다. 집권세력이나 대다수 유림들은 중국이 운수 사나워 졌으리라 생각하면서, 기존 인식을 쉽게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눈여겨 본 백성은 달랐다. 중국을 얕보기 시작하였다. 중국 중심의 거대한 판축이 뒤집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국은 자신의 존립마저 위태로웠다. 그 틈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1904년 끝내 러일전쟁을 벌여 그들을 밀어내고, 조선을 틀어쥐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배상금을 챙기지 못해 손해가 컸지만, 뒤에서 조정하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전쟁자금을 빌려주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일본은 침략 걸음걸이를 멈출 수 없었다. 한국 강점에 이어 만주 침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갔다. 망해야 끝나는 것을 뒤에 가서야 알았다. 1894년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1945년에 가서 끝난 것 같았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이어져 1950년대까지 뻗쳤다. 그 그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조상들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가?

백 년 전과 다른 점은 남북 분단이다. 그래서 서해교전이니, 연평해전, 또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타나는 주변 국가들의 대응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이 트집을 부리면, 주변 국가들은 기다리기도 한 듯이 영향력 행사에 나선다. 러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향력을 뻗친다.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면서 마치 종주권을 행사하듯 나온다. 미국은 태평양이 자국의 영해인양 나서고, 일본은 이익선을 챙긴다.

이러한 틀은 나라 안이라고 다를 게 없다. 청일전쟁 무렵 친청·친일 세력으로 나뉘어 티격태격하던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강력하게 두들겨서 다시는 쉽사리 대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정상적인 상대도 아닌데 굳이 훈련을 계속하여 위기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차이가 진정 나라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권욕에서 나온 것인지 차분하게 살펴볼 일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때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조상들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