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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이야기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가 목격한 교토의 명승지
  •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통신사 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에도 막부는 신의를 통할만 한 상대인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豊臣)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정치체를 에도(江戶) 막부(幕府)로 부른다. 정권 장악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국교를 요청했고, 조선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은 오랜 내부 논의와 교섭 끝에 에도 막부와의 국교를 결정하고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1607년의 사절은 임진왜란 이후 첫 번째이자, 에도 막부와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 신의를 통한다는 의미의통신사(通信使)’ 대신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 것은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회답이란 외교적 사항에 대한 답례라는 뜻이고, 쇄환은모두 데려온다는 의미다. 신의를 통할 수 있는 상대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우리 사절의 제일 목적은 어디까지나 막부 쇼군(將軍)의 요청에 대한 회답과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것이라는 점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조선은 1607, 1617, 1624년에도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전쟁 직전과 전쟁 중에 일본을 왕복한 통신사만큼은 아니겠지만, 전쟁의 상처가 미처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국교를 위해 파견된 사행 인원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이 남아있던 교토(京都)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화를 통해 조선 사절이 가졌던 심상에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통신사, 도요토미의 정치 근거지 교토에 가다

1607 1 12일 사행길에 오른 사절은 4 12일 교토로 들어섰다. 사절이 처음 목격한 건물은 거대한 5층 탑이 눈에 띄는도지(東寺)’사원이었다. 사절의 부사(副使)인 경섬(慶暹)구름 위까지 솟아 바라보니 가물가물하다는 감상을 남겼다. 통신사가 여장을 푼 곳은 교토에서 가장 큰 사찰 중 하나인 다이토쿠지(大德寺)의 덴즈이지(天瑞寺), 당대를 풍미한 차인(茶人) 센리큐(千利休)의 유서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사절은 도후쿠지(東福寺), 삼십삼간사(三十三間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지온인(智恩院) 등 유명 사찰과 명승을 두루 둘러보았다. 삼십삼간사에 가득 찬 불상이 발산하는 광채에 눈을 빼앗겼고, 기요미즈데라에서는 산 중턱에 자리한 높은 누각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그러나 사행단이 멋진 풍경에 취해 있던 것만은 아니다. 교토에는 귀무덤(耳塚)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의 코나 귀대부분은 코를 베어 묻어둔 곳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학자이자 관료인 강항(姜沆)은 이를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경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秀賴)너희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남겼다고 하였는데, 이를 경섬이 직접 목격한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전쟁의 뼈아픈 상처를 되새기며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가 목격한 교토의 명승지임진왜란 후 두 번째 사절의 명칭도 회답겸쇄환사였다. 1617 7 9일 부산을 떠난 사절단은 8 21일 교토에 도착했는데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은 도지, 숙소는 다이토쿠지로 이전과 동일했다. 8 26일 후시미(伏見)에서 쇼군을 만나 국서를 전달한 사절단은 교토로 돌아오는 길에 다이부쓰지(大佛寺)에 들러 식사 대접을 받았다.


다이부쓰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사찰로, 호코지()라고도 불린다. 창건 당시 만들어진 불상은 현재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 있는 불상보다 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596년 교토 부근을 덮친 대지진으로 불상 및 건물이 파괴되고, 1602년에는 화재까지 발생했다. 1612년에는 불상을 다시 만들었지만 1614년 범종의 문구를 둘러싼 사건은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662년의 지진, 1798년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뒤에는 옛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1617년 도쿄를 방문한 사절단은 1612년 재건된 불상과 불전을 감상하였다. 다이부쓰지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관계,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정사 오윤겸(吳允謙)과 종사관 이경직(李景稷)은 웅장한 불상과 거대한 건물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경직은 이날 다이부쓰지 근방의 귀무덤을 목격하고, 히데요리가 세운 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뼈에 사무치는 통분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다.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은 1624년 조선을 출발한 사절 때까지였다.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세습 축하를 위해 파견된 사절단은 1625년 귀환 길에 교토에 머무르다 1 17일에 다이부쓰지를 찾았다. 부사 강홍중(姜弘重)은 건물의 장대한 규모와 거대한 금불상은 물론 대좌와 사방 벽을 모두 금으로 칠한 사실에 놀라워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재물을 소모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은 다이부쓰지를 중건하게 했다는 소문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이부쓰지 앞의 귀무덤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설명하기를히데요시가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그가 죽은 후 히데요리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고, 어떤 사람은진주성 함락 후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를 여기 묻었다고 하니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후로도 통신사는 교토를 지날 때마다 그곳에서 항상 임진왜란의 기억을 되새겼다. 다이부쓰지에서의 접대는 조선의 항의에 의해 1719년 이후 폐지되었다.


세 회답겸쇄환사가 교토에서 보았던 사찰과 유적은 현재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모든 이들이 교토 관광 시 거의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즐비하고 관광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명승지 교토. 그러나 그 주변에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취가 4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를 확인하고 역사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 통신사의 발자취와 고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사절의 명칭에도 명시한쇄환, 잡혀간 조선인의 송환이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