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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육식’ 단상(斷想)
  • 김민규 (역사학박사·재단 명예연구위원)

‘육식’ 단상(斷想)아버지의 기일이 속해있던 8월 제사에 이어, 한 달 만에 엇비슷한 추석 차례상을 차리며 문득 엉뚱 발칙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개고기를 상에 올리면 혹 예법에 어긋나 불효·불경이려나? 지난 8월 제사상엔 평생 못 드셨던 술을 왜 올려야 하나 싶어 평소 즐겨 드신 대추차를 올리지 않았는가! 아버지는 30년 전 내 결혼식 날 기쁘다고 하시면서 소주잔으로 딱 한 잔 술을 드시고는 종일 앓아누우셨다고 들었다. 풀 투성이 샐러드를인간의 음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셨던 아버지의 개고기 사랑은 너무나 각별하여그러할 연()’ 자를 파자(破字)하여 개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파안대소하곤 하셨다. 육식 예찬론자였던 아버지 덕에, 요즈음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본디는 채식주의자였던) 어머니로부터 이틀에 한 번꼴로 똑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내 이제 와서 말이지만 처음 시집와서 밥을 차리는데 매일 같은 반찬을 해대느라 정말이지 고생이 말도 못 했다. 아침엔 닭, 점심엔 돼지, 저녁엔 소. 다시 다음날이면 아침엔 돼지, 점심엔 소, 저녁엔 닭. 어쩌다 고기가 없으면 생선 반찬이라도 해드려야 했으니까쯧쯔. 글쎄, 처음엔 네 아버지가 진짜백정의 자식인줄 알았다니까.”

유독 바닷고기인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한국의 땅고기 육식 문화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한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차례 고기 맛을 본 후 그 맛을 외워버린 그들이 우리의 자랑 불고기를 야키니쿠() 둔갑시켜 먹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불고기 맛을 보기 위해 동경의 신오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 타운에 방문한 일본인들이 불고기를 먹거나 갈비를 뜯으며 나누는 대화에는한국인들은 개고기를 먹는다. 이 얼마나 혐오스러운가!”라며 개고기 식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나마 본디 간이 작은 보통의 일본인들은 그런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는 편이지만, 극우 혐한론자들은 아직도 입에 게거품을 문다. 개고기나 먹는쵸센진은 하루 빨리 너희 나라로 꺼지라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불교의 영향이 각별한 전통시대의 조상들이 짐승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많은 기록물은 그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농번기인 4~9월까지 6개월간 소, , ‘’, 원숭이, 닭에 대한금식령’(『日本書記』,675년조)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뒤집어 보면 그 기간만 피하면 그것들을 마구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8세기 나라(奈良)시대에는 날다람쥐마저 잡아먹었고, 심지어는 사슴의 내장에 식초를 쳐서 회로 먹었다. 교토(京都) 옆 나라(奈良)에 가본 이들은 모두 실감하겠지만 사슴은 이미 카스가(春日)신사의신주로 신성시되고 있으며 1957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그야말로 사슴들의 나라()가 됐다.


아무튼 이외에도 멧돼지와 멧돼지 껍데기, , 토끼, 너구리, 수달 등을 잡아먹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만난 적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후로이스는 일본인들이들개’, 원숭이, 고양이와 함께 학을 즐겨 먹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17세기에 간행된 일본 요리책 『요리물어(料理物語)』는 사슴, 너구리, 멧돼지, 토끼, 수달, , ‘를 재료로 하는 국물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너구리가 있었는데 사냥꾼이 총으로 쏴 끓이고 또 구워 먹은 다음 나뭇잎으로 살짝 덮어...”라는 가사의 19세기 중반 동요 「안타가타도코사(あんたがたどこさ:너희들 어디 있니)」를 비롯하여 너구리를 소재로 한 노래나 이야기가 상당수 있는 것, 그리고 이름 뿐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남녀노소 할 것 없이타누키(たぬき:너구리) 우동을 즐겨 먹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의 너구리 사랑에 작금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편, 토끼고기를 소금에 절인 뒤 발효시켜 간장으로 사용했다는 기록과 함께, 승려들이 몰래 토끼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도 보인다(『嘉元記』,1361년조). 승려들이 육식, 특히 네발 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두려워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토끼를 새로 간주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토끼든, 새든 모두마리로 세지만. 짐승을 셀 때()’로 세는 일본인들이 유독 토끼만은 예외적으로 새를 셀 때처럼()’로 세고 있다. 


‘육식’ 단상(斷想)모든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본인이 고래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듯. 나는 결코 개고기 옹호론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국의 식문화에 야만적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결례를 범하는 행동은 삼가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세계인들, 특히 서양인들은 고래 식용 상용화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인을 경멸한다. 일본은 에도(江戶)시대 경조(鯨組)라고 불린 집단이 조직적으로 대규모 포경(捕鯨)을 행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서양식 포경술을 모방하여 남극해 등 원양으로 진출해 닥치는 대로 고래를 잡아들였다. 오늘날은 남획의 위험성 등으로 여러 국제 규약이 있어 많은 제약을 받고는 있지만, 일본은 주로 남극에서조사(調査) 포경이라는 명목으로 포경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이 국민의 세금으로 행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지방 여행 중 고래 고기를 판매하는 음식점을 우연찮게 자주 만나는 것은조사를 위해 잡거나 잡힌 놈들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고래잡이가 횡행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생식(生食)에 관한 자부심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10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텐리(天理) 대학에서 학회를 마치고 친분 있는 일본인 선생 대여섯 명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생선 초밥, 생선회와 함께 아니 이런! 생닭고기가 나온 것이 아닌가. 이것만큼은 절대 못 먹는다는 내게 계속 장난을 치며 생육을 권하는 동경대 R선생에게 말했다. 한국에 올 때 개고기를 먹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나도 이걸 먹겠다고.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지만 결국 한 입 씹고 말았다. 그 후 일본에선 R선생을 자주 만났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나라에서 만난 적은 아직 없다.


이번엔 7년 전 경험이다. 평소 나를한국 아들로 여겼던 도이 류이치(土肥隆一,1939~2016) 선생이 내가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원회관으로 부르셨다. 한국의 우리 집에서 대접받은 한 끼 식사를 잊지 못하신다며 일본 국회의사당 뒤편 골목의 한 지하 식당으로 데려갔다. 물량이 달려 한 접시밖에 없다고 한번 먹어보라 권하시면서 당신은 다른 음식을 시키셨다. 접시가 비워지고 나니 그제야 말씀하신다. “이게 바로 고래 고기일세. 나는 공인이라 먹으면 안 돼서.”


일제 강점기경성의 동대문구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일본의 패전으로 부친의 손에 이끌려 본국으로 귀환하던 기차 안에서 조선인이 선뜻 건네주었다는 주먹밥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셨다. 자네가 방금 먹은 그 고기 맛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시면서. 목사 신분의 국회의원이었던 선생께서는 2011 2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에게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중단하라는 내용의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로 극우 세력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덕분에 신칸센에서 내리면 경찰이 바로 에스코트해 주는 통에 귀가가 아주 편해졌다고 하시면서. 문득, 돌아가신 두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