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지난달 28일 <전통시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연구 개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재단은 2015년 하반기부터 한국사 전 시기를 아우르는 대외관계와 외교사 편찬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동안 45명의 연구자가 편제를 짜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통사 체제의 한국외교사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올해는 그동안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고대·고려·조선·근대 편으로 구성된 4권 편제의 전통시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출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회의는 그동안의 연구 사업 내용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편집 발간 과정의 제반 문제를 점검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오전 회의에서는 한국 외교사 연구 서술의 주요 문제, 재단의 역사정책 형성 기능과 한국 대외관계 연구, 중국의 대외관계사 연구와 역사 해석의 정치 등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통해 이 사업의 문제의식과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관련 문제를 협의하였다. 오전 1부 회의에 이어 개최된 오후의 2부 회의에는 고대 편 집필자들이 참여하여 고대 한국의 대외관계 및 외교사의 쟁점과 서술 방향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총론적 기획
재단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외교사 통사가 개발되지 않고 있는 학문적 공백을 시급히 메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사업에 착수하였다. 해방 70년이 넘도록 한국 외교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재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거니와, 이런 학문적 결손이 주변국의 역사 왜곡 대응에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 것이다. 주변국의 역사왜곡은 대부분 한국의 대외관계사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 일본과의 ‘역사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점과 지식을 체계화하고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의 큰 줄기를 놓치지 않으면서 현실을 성찰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역사하기’(doing history)의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 자본의 축적이 역사정책의 수립과 실천, 미래세대를 위한 스토리텔링 개발 등에도 큰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재단은 이 사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 편찬위원회위원장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구성하고, 위원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을 것인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 왔다. 역사상 우리 역사 공간을 둘러싼 국제 환경의 특징을 살피고, 우리 선조들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는지, 어떤 선택이 가능했고 무엇을 성취했는지가 기본 내용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서술의 대상과 범위가 무엇이냐부터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대외관계사인가, 외교사인가, 대외교섭사인가, 대외교류사인가, 고대국가 간의 관계를 외교로 볼 수 있느냐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로 아우를 수 있다는 데까지 의견이 모였다. 서술 내용의 선별이나 용어의 통일 역시 고민거리였다. 편찬위원회는 집필자 개인의 학문적 견해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이런 문제들을 하나의 흐름 속에 녹여내기로 하고 속도를 붙이기로 했다.
우리가 학계의 역량을 모은 한국외교사를 갖는다는 것은 세계에 한국사의 위상을 올바로 세우고,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 미래 역사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는 의의가 있다. 외교란 국가가 국제환경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세계무대에서 자국의 목표와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성과물은 한국사를 권력 정치의 객체로 재단해 온 주변국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함은 물론,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역사적 지향을 탐색해 갈 수 있는 학문적 입론점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국민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지정학적 조건론’이나 ‘강대국 결정론’을 불식하고, 한국사의 주체성과 발전 경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진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주변부 의식’을 떨치지 않으면 미래를 향한 용기와 상상력은 충전되기 어렵다. 우리 역사가 마주했던 상황과 이를 헤쳐 나온 선인들의 경험과 선택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채, 미래 역사 비전을 세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숨 쉬었던 공간에서 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우리가 한국의 역사를 떠나 통일과 통일 이후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학문적, 실천적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
사실 그동안 한국외교사는 거의 불모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대학(원)에서는 관련 전공 학생들에게조차 한국 외교의 전체적 흐름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어려웠고, 일반 국민들, 심지어 정책 결정자들도 주변 환경의 이해나 정책 설계에 우리 자신의 경험보다 외국의 이론과 사례를 더 크게 참고해 온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다툼의 여지가 큰 쟁점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한국외교사를 관류하는 환경과 제도, 한국외교사의 범위와 연구 방법 등을 망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들을 후속 연구로 미루고 지금까지의 성과를 우선 정리하여 내기로 한 이유이다.
한국외교사 개발이 갖는 이와 같은 의의에도 불구하고 출간을 준비 중인 한국외교사가 완벽한 최종의 것일 수는 없다. 관련 분야 연구를 자극하고, 후속 세대가 체계를 다듬고 살을 붙여 나갈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았다는 점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지만 3년여에 걸친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우리 외교사에 대한 학문적 불모성을 타개하고, 한국의 역사에 대한 주변국의 ‘은밀한 기획’에 대응해 나가는 논리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체계를 수립하려는 재단의 노력이 한국의 역사에도 면면한 ‘외교’의 호흡이 있어왔고, 또 있을 것임을 천명하는 학문적, 실천적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