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재단 새 책
고구려 산성 247곳에 담긴 이야기
  • 박장배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고구려 산성 247곳에 담긴 이야기

고구려 산성 연구는 고() 정원철(1975-2016) 박사가 2010년 길림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저자는 이 세상에서 416개월여를 지내다 홀연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고,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담은 책이 되었다. 함께 했던 젊은 연구자를 잃은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이 책은 슬픔을 넘어 여러 가지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책의 모체가 되는 논문은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사업(2002~2007)이 진행되고 그 여파가 강하게 미치던 시기 중국 동북지역의 대학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실증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깊은 시대적 고민과 긴장 요소, 그리고 자존과 연대의 뜻을 품고 있다. 이래저래 이 책은 저자가 학계에 남긴 큰 선물이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종합 분석하다

미처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성곽과 산성이라는 큰 선물들을 숱하게 접한다. 산성은 기본적으로 전쟁이라는 중대한 국가활동을 전제로 하는 방어시설이다. 특히 고구려는 산성과 함께 탄생한 나라이며 전쟁 속에서 성장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당시 국가로서는 예외없는 형편이었다. 유형의 점들이 분포하는 모양을 보고 방어전략과 같은 무형의 체계를 볼 수 있어야 역사 고수라고 할 수 있겠으나 유형의 것도 그냥 어수선하게 보이는데 일반인들이 무형의 것까지 볼 내공을 갖추고 있겠는가. 이 점에서 지식생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겠다. 산성, 산중도시(mountain city-sites)는 그 많은 연구의 출발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고구려 산성만 해도 247곳이다. 그중에 138(55.9%)는 중국 경내에 있고, 36(14.6%)는 북한 경내에 있으며, 73(29.5%)는 남한 경내에 있다. 이들 산성에 대해 저자는 고구려 산성의 분포와 유형”, “고구려 산성의 축성법 분석”, “고구려 산성의 분기와 발전 양상을 주요 분석 내용으로 설정하였다.

고구려 산성의 형태와 축성법을 정리한 부분을 보면, 우선 한국학계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고구려 산성의 유형을 분류하는 시도를 한 학자는 정약용이었다. 그리고 고구려도 제한된 자원으로 견고한 성채를 세우기 위해 수많은 혁신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석성이다. 석성은 고구려 산성 축성법의 특징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152) 고구려 산성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면, 필자는 쐐기형 성돌의 사용을 들고 싶다.”(442)는 등의 내용을 보며, 성돌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된다.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언제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가 성돌을 눈여겨 봤을까. 이 책을 읽은 이상 이제 성돌 하나도 범상하게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고구려 산성 247곳에 담긴 이야기

양국 학계의 성과를 망라하려는 실증적 노력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의미 에서는 한 중간 치열한 역사경합의 소용돌이 를 횡단하기 위해 저자가 노심초사했던 심정, 그리고 순수 역사 연구라는 영역의 존재방식 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견 이 책의 서술 방식은 고구려 중심적 시각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중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논문인지라 서쪽에서 고구려 중심부 쪽으로 시선이 움직이고 있다.

    

예컨대, 연주성(백암성)의 경우가 그렇다. 고수성 은 연주성과 마찬가지로 요동평원에서 천산산 맥 산간지대로 나가는 길목에 해당하는데 대체 로 연주성과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140) 여 기서 연주성은 보통 한국학계에서는 백암성이라 고 하는데 저자의 책에도 백암성은 현재의 연 주성으로 비정된다고 했다.(472) 박작성()이라고 추정되는 호산산성도 그저 호산산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각주를 보면 박작성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에 따랐는지 번역본에는 기원전 1세기 말의 홀본성(오녀산성)이라는 표현이 있다.(497)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저자는 한 국학계와 중국학계의 성과를 망라하여 집약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실체를 가진 소재를 다룬 매우 실증적인 연구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실체와 국력 을 계산할 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전국토 에 점을 찍듯 여러 곳에 건설되지만 도시를 배후지로 하고 도시들을 잇는 교통로로 연결되는 매우 유기적인 국가시설이다. 성곽과 산성은 복합유적으로 문화유적인 동시에 토목건축기술을 담은 기술유적이다. 산성, 특히 석성은 성돌을 하나하나 쌓아야 완성되는 건축물이다.

저자는 여러 연구과제들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착실한 실증 작업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하지 만 안타깝게도 저자가 남겨 놓은 일이 너무나 많다. 고구려 산성으로도 역사지도 도엽(주제도) 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작업을 통해 고구려 산성의 다양한 역할과 가치를 새로 운 차원에서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디지털 산성 복원은 어떨까.

아무튼 저자는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는 정원철은 겸손 하고 온화하며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는 애제자이자 젊은 학자였다고 했다. 이만큼 저자의 인 품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글은 그 사람의 인품을 품고 있다는데, 저자의 책은 또 하나의 듬직한 산성이자 저자가 미래로 보낸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