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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도시 이야기
작지만 깊은 역사의 층을 간직한 고도 낙양
  • 공원국 (작가)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성주풀이는 왜 하고 많은 도시 중 낙양을 호출했던가? 과연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무덤들이 즐비할까? 성당(盛唐)의 시인 이백은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에서 이렇게 노래 불렀다.

뉘 집에서 나오나, 밤 뚫고 은은히 울리는 옥피리 소리. 봄바람 타고 흩어져 낙양성 안에 가득 차네(誰家玉笛暗飛聲, 散入春風滿洛城)”

낙양성은 과연 옥피리 소리가 가득 채울 정도로 소담스러웠을까? 이제 이 노래들에 나오는 중원의 고도로 낙양 여행을 떠나보자.

 

작지만 깊은 역사의 층을 간직한 고도 낙양낙양삽으로 대표되는 역사 유물의 도시

오늘날 중국 땅에 나라가 생긴 이래 우여곡절은 있었으되 중심은 대개 서(西)에서 동()으로 이동했다. 북방에서는 주대(周代)의 도읍이었던 서안(西安)에서 오늘날 도읍인 북경(北京)까지 중심이 옮겨갔고, 남방에서는 초() 문화를 이뤘던 강한평원(江漢平原)의 형주(荊州)에서 장강(長江)이 바다와 만나는 상해(上海)로 무게 중심이 옮겨왔다. 낙양은 하남성, 동과 서의 가운데, 즉 중국 대륙의 중심부에 있어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이 땅에 자리잡은 3천년 고도다. 동주(東周), 동한(東漢), 북위(北魏), (), () 13개의 나라가 도읍하였다 하여 13조 고도(十三朝 古都)라 불리는 이 도시는 얼핏 보면 평범한 지방의 2급 도시에 불과하다. 중원에 있는 고도가 이렇게 초라해도 되는가? 딱히 아름다운 자연 풍광도 없고, 유명한 음식이나 즐길 거리도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여행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잊힐 때쯤 아쉬워 한 번 들르고, 한 번 들르면 적어도 며칠을 보내는 곳이다. ‘낙양삽이라는 기이한 물건이 말해주듯 이곳은 뭇 도시들이 쉽사리 모방할 수 없는 역사 유물의 층이 켜켜이 쌓인 곳이기 때문이다.

낙양삽’, 이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목숨을 걸고 선대가 남긴 보물을 찾던 도굴꾼들이 캄캄한 어둠 속 최소한 몸을 움직일 공간만 확보한 채 무덤을 파내려가기 위해 만든 특수한 삽, 즉 수동 천공기인 셈이다. 어린 아이 하나가 통과할 만한 동그란 구멍이 수직으로 뚫린 무덤이라면 그 속은 비어있을 가능성이 크고, 실제 규모 있는 무덤이라면 그런 구멍을 한두 개는 갖고 있다. 왕의 무덤을 처음 파 내려간 이들은 횡재했을 것이고 장상의 무덤이라도 처음 들어간 이라면 한몫 단단히 챙겼을 것이다. 허나 무덤의 역사만큼 도굴의 역사는 길고, 난리만 나면 군벌들이 무덤을 파헤쳐 통째로 기물을 꺼내갔으니 허탕 친 좀도둑들도 부지기수였으리라. 하지만 낙양이라면 삽을 들 만했기에 유서 깊은 도굴용 삽까지 발명되었을 것이다. 성주풀이 가사처럼 낙양성 십리하에는 무덤이 즐비하다.

 

 

동주 순마갱과 백마사, 용문석굴 그리고 모란꽃

낙양의 역사를 확인하고자 낙양삽을 들 필요도 없이 큰 무덤들은 잘 발굴되어 방문자를 기다린다. 규모야 대단하지 않지만 동주 순마갱(殉馬坑)은 무덤 중 할아버지 격이니 꼭 한 번 들러보자. 무덤으로 들어갈 것도 없이 지상의 박물관과 유적 몇 군데만 잘 찾아 다녀도 낙양의 역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고도가 품고 있는 유산은 차고도 남지만 지근거리에 있는 백마사(白馬寺)나 용문석굴(龍門石窟)만 다녀도 하루 이틀로는 부족하니까. 백마사는 A.D.68년 동한대에 처음 세워져 무려 2,000년이나 터를 지켜왔다. 비록 그때의 건축물은 사라지고 오늘날 남은 것은 대개 명대 이후의 것들이지만 터만은 그때 그대로다. 가람(伽藍)은 명당자리에 세워진다. 4월말 낙양은 어디를 가나 흐드러진 모란꽃이다. 중국인의 모란 사랑은 유별나지만, 그중에서도 낙양의 모란은 향도 모양도 으뜸이고 더구나 고요한 가람 안의 꽃은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윽한 모란 향을 맡으며 사원을 거닐자면 비록 쇠락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고도의 향에 서서히 취해간다.

시에서 30리 남짓 떨어진 곳, 유유히 흐르는 이수(伊水)가에는 인간이 만든 기적이 몇 리에 걸쳐 이어져 있다. 바로 용문석굴, 대동의 운강굴, 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칭송되는 유적이다. 가람은 한나절 구경거리가 못 되지만 이 유적은 한나절로 부족하다. 북위 시절에 시작되어 약 400년 동안 만들어진 미술사의 회랑을 따라 걸으며 무려 10만 개나 되는 조상의 얼굴만 확인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안타깝게도 두부가 떨어진 불상이 너무 많지만 천천히 길을 걸으면 북위의 기상, 수당의 흥성함, 송의 정제미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천수백 년 풍상을 견뎌왔건만 하나하나의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어, 어쩌면 그때의 장인들이 밤이면 몰래 나타나 자신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닦은 듯 선연하다. 전하는 대로 17m가 넘는 비로자나 대불이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뜻 것이라면, 무후는 기록에 나오는 것보다 더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다. 불교는 서방에서 왔으되 이 조상들은 모두 중국 각 왕조의 옷을 입고 그 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니, 예술은 동서남북을 움직이며 현지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 모두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마술인가 보다.

낙양은 덜 우악스런 도시인데다 고풍이 살아있어 북경 등에서 흔히 객이 느끼는 과도한 콘크리트 고층 건물의 위압감 따위가 없어 좋다. 운이 좋아 모란이 피는 시절 이곳을 방문한다면, 비록 이백이 노래한 봄날 밤 그 옥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바람 타고 퍼지는 모란 향만큼은 그 옛날에 못지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