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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와 한국의 접속
  • 최덕규 (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왜 텔레그라프(Telegraph)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개화시기의 지식인 유길준은 전신기의 출현을 그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과장해서 말하기를 전신기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 뒤부터 온 세상이 한집안처럼 되었다하였는데, 실상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서유견문(1895)에 적고 있다. “오늘날 서양 여러 나라의 전선이 바다와 육지에 종횡으로 깔려 있는데, 커다란 거미가 공중에 그물을 쳐 놓은 것과도 같다는 그의 표현은 한국이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거미줄과 같은 웹(Web)모양의 글로벌 통신망에 접속해야 할 당위를 설명하고 있다. 유길준이 이와 같이 주장한 것은 한국이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근대적 자주 독립국가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세계와의 소통이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뮤엘 모스(Samuel Morse)의 전신 시스템이 정착(1844)된 이래 대표적인 전신기술 혁신 사례가 바로 절연피복을 입힌 해저케이블(Submarine Cable)의 발명이었다. 유럽과 북미 대륙을 연결하는 대서양 해저케이블이 성공적으로 부설된 이래(1866) 20년간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는 새로운 통신기술인 전신에 열광했다. 이후 전화, 팩시밀리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촛불혁명을 이끈 스마트폰과 같은 첨단기술도 19세기의 전신이 그 원형이다. 이에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의 구축과 한반도의 접속 과정은 IT강국인 한국의 통신역사뿐만 아니라 세계통신혁명과 연동하여 자주 독립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던 근대 한국의 개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한국과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의 접속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서구의 연구에서는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신 네트워킹을 설명하고 있는 반면, 국내의 연구는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분리된 학제로 인해 한국의 전신 역사에 대한 연구는 있으나 그것과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와의 접속과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는 없다. 이는 일국사(一國史) 연구가 가지고 있는 한계인데, 전신의 속성은 네트워킹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갑신정변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보다 빨리 현장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한반도에 전신을 가설하였다는 학설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한반도가 동아시아 위기의 근원이라는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따라서 글로벌 히스토리의 시선에서 이 주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와 한국의 접속글로벌 전신 네트워크는 어떻게 구축되었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 해협에 해저케이블이 가설(1851)되면서 영국 주도의 국제적인 전신 네트워크 구축사업이 시작되었다. 맨체스터에서 면직업에 종사하면서 거부가 된 존 펜더(J. Pender)는 대서양 해저케이블을 성공시킴으로써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 구축을 이끌었다. “전신왕(電信王)”이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세계 해저케이블의 약 70%를 보유함으로써 국제 전신을 지배하는 통신제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펜더의 제국은 대영제국의 성쇠와 그 사이클을 같이 하였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통신의 판도가 유선에서 무선통신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펜더가 개척한 동아시아 전신 네트워크는 남방노선이었다. 그는 1869년 영국-인도 구간의 전신가설을 완료한 후, 1871년 인도에서 사이공(Saigon)을 경유하는 싱가포르-홍콩 구간을 개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당시 기술 수준으로 런던에서 인도를 거쳐 홍콩으로 전보를 수 . 발신하는데 53분이 소요되는 남방노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전신은 남방과 북방의 양대 노선으로 유럽과 연결되었는데 북방노선은 덴마크의 기업가 티트겐(Tietgen C.F.)이 설립한 대북전신회사(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1869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의 대외전신사업권을 덴마크 출신의 황태자비인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ya Fedorovna)의 모국 기업인 대북전신회사에 부여한다는 협정서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1872년 대북전신회사는 블라디보스토크-나가사키-상하이 해저케이블을 공식 개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의 시베리아 전신선을 통해 유럽과 미국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완공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전신선은 영국과 덴마크를 앞세운 러시아가 남방과 북방노선을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한편 한국의 전신은 외형상 청국과 일본이 이를 독점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상 청국과 일본의 대외 해저케이블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덴마크의 글로벌 통신기업들이 막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개별 국가들은 기술력과 자본 부족으로 독자적인 해저케이블을 설치할 능력이 없었다. 이는 글로벌 전신기업의 독점권을 강화시킴으로써, 특히 일본의 대륙 진출은 외국기업의 독점기한이 만료될 때까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912년이 되어서야 덴마크 전신회사의 해저케이블 독점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개별 국가의 팽창정책이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던 글로벌 기업에 의해 견제되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 모델이 동아시아에 등장하게 되었다.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와 한국의 접속한국은 어떻게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에 접속되었을까?

한반도는 지정학뿐만 아니라 전신 네트워크의 측면에서도 천혜의 장점을 지닌 곳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는 육상전신으로, 일본과 미국은 해저케이블로 연결 가능한 사통팔달의 요충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해저케이블이 양륙(揚陸)된다면 이후 국내 전신과 접속되어 만주, 중국, 유라시아의 전신과 연결되는 허브가 될 수도 있었다. 만약, 근대 한국이 전신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면, 그 지리적 장점을 배경으로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의 주요 거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전망은 영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기존의 동아시아 통신시장의 재편 가능성과 맞물려 있었다. 종래의 유럽 주도의 전신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위치는 변방이었지만, 미국이 태평양 해저케이블을 가설할 경우, 판도는 일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 말부터 캐나다 횡단철도 완공을 염두에 둔 태평양 해저케이블(The Pacific Cable) 부설 계획은 대서양 해저케이블 가설에 참여했던 미국인 기업가 사이러스 필드(Cyrus Field)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구체화되었다. 1880년 그가 일본과 청국을 방문한 이유는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해저케이블로 연결하려는 계획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럽 중심의 통신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었던 한국이 태평양 해저케이블에 능동적으로 접속한다면, 개방을 지체한 한계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은 188421일 부산과 나가사키를 잇는 한일해저전신이 개통되면서 전신 입국의 단초가 열렸다. 이 해저케이블은 덴마크의 대북전신회사가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정부의 위임을 받아, 일본의 해외케이블에 대한 20년 독점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가설했다. 그럼에도 한일해저케이블은 한국이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 한국은 당시까지 국내 전신이 가설되어 있진 않았지만, 고종정부는 한일해저케이블 가설 협상을 앞당겨 조속히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에 한국을 접속시키고자 했다.

한국이 글로벌 전신 네트워크에 접속될 경우, 전신을 통해 수입되는 서구의 정보와 지식은 고종 정부가 추진했던 근대적 개혁 정책의 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해저케이블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속된 한국은 국제사회와 연동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국제기준에 맞는 자주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해야 했다. 이에 한국을 서구적 주권국가의 기준에 맞게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입각한 유교적 세계관을 폐기하고 서구 자본을 유치하고 시장 개방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정비와 인재양성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임오군란(1882) 직후 고종이 척화비(斥和碑) 철거 교서를 내려 개혁 개방의 의지를 천명한 것도 이 같은 개혁 정책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의 우정제도를 중시한 고종과 홍영식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고종 정부는 한 . 일 해저전신선이 덴마크 전신회사에 의해 가설된 사업 방식에 주목했다. 고종 정부의 전신 관련 기술 도입선은 덴마크뿐만 아니라 태평양 해저케이블 가설을 계획하고 있던 미국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는 고종의 개혁정책을 돕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이 미국 시찰과정에서 우정제도에 가장 관심을 보였던 이유이기도 했다.

고종은 홍영식을 우정사(郵政司) 업무를 총괄하는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1883. 2.19.)하여 지지부진하던 한 . 일 해저전신 가설 교섭을 마무리함으로써 한국을 시베리아 전신선을 통해 유럽과 접속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이후 홍영식은 미국 시찰을 위한 한국 보빙사(報聘使)의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 미국사행(1883.7.-12.20.)을 다녀왔다. 한국 보빙사의 활동을 다룬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기사(1883.11.8.)그 성과물의 하나로 귀국 즉시 미국을 모델로 한 우정제도(postal system)를 수립하도록 권고 받았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에 고종은 우정총국(郵征總局) 설립으로 화답했다. 1884422일 고종의 칙유(勅諭)를 받들어 창설된 우정국 총판(總辦)에 홍영식이 임명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고종 정부가 시도했던 미국모델의 우정제도 도입은 상당한 곤란이 예상되었다. 이는 청국이 미국의 태평양 해저케이블의 중국 양륙을 적극 반대한 반면, 대내 전신가설의 사업 파트너로 덴마크의 대북전신회사를 선정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베리아 전신선을 한 . . 일과 연결시킨 덴마크의 해저케이블과 아시아와 북미를 연결시키고자 한 미국의 태평양 해저케이블은 상호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한국의 개화기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고종 정부가 추진한 미국식 우정제도 도입 시도의 성패는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고종 정부의 개혁정책의 전망과 맞물리게 되었다. 과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청국에 맞서 고종 정부는 미국식 우정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을까?

청국은 철도와 함께 전신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도구로 간주했기 때문에 미국보다는 유럽의 작은 국가인 덴마크의 기술력을 활용하여 통신의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청국 군대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과 김옥균이 주도했던 갑신정변(1884.12.4.)을 진압했고 그 와중에 홍영식은 피살되었다. 그 결과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꿈꿨던 고종의 개혁정책은 한반도 전신을 둘러싼 미 . 중의 대립구도 속에서 굴절되고 왜곡되어 갔다.

자주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능동적인 전망을 가진 갑신정변이 청국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한국의 전신 주권 역시 외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불법점령(1885.4.7.)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전신선인 제물포-서울-의주 구간의 서로전선(西路電線)이 가설되어 청국과 접속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철회시키기 위한 국제공론을 일으킬 방편으로 한반도와 국제사회를 연결하는 전신선 가설에 주목했다. 전신선의 연결이야말로 한반도 문제에 열강을 깊숙이 개입시킴으로써 상호 견제를 통해 특정국의 독점지배를 제어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이 청국 정부에 전신선 가설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요청한 것도 국제공론을 통해 거문도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 고육책이었다. 거문도 점령을 지휘했던 도웰(W. Dowell) 제독이 런던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고종의 입장은 강경했다. “영국 국기가 거문도에 게양되는 경우, 한국은 서울의 영국영사관 철수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고종 정부로 하여금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 청 정부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885717일 체결된 한중전선조약(韓中電線條約)에 따라 청국이 한반도에 전신선 가설을 담당하되, 그 자금은 청국의 대한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기로 합의하였다. 결국, 고종 정부의 전신주권 확보 노력은 영국의 불법적인 영토침탈을 계기로 한국 전신에 대한 청국의 지배로 귀결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정보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권력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 영국의 불법적인 거문도 점령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전신은 청국에 의해 가설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일본 역시 한반도 전신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근대적 우정제도의 선구자였던 홍영식은 비운의 혁명가로 생을 마감했고, 그를 발탁했던 고종 역시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전신 주권을 일본에 탈취당한 후, 1919년 그들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통신강국으로 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