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극장가에 걸린 우리 영화 한 편이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들 틈에서 조용히 3백만 관객을 동원했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밝지만 진정성 있게 다룬 영화 <아이 캔 스피크>다. 일본군‘위안부’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피해 당사국인 우리나라에서조차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가해 당사국인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 중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사무국장 와타나베 미나 씨를 만나 일본군‘위안부’와 관련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담 : 남상구 한일관계연구소 근현대연구실장
와타나베 미나(渡邊美奈)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wam) 사무국장
1990년대부터 여성의 인권과 전시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NGO에서 스태프와 운영위원을 하면서 일본군‘위안부’ 생존 피해자의 피해회복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현재는 액티브 ‧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일본 정부가 국제법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고자 유엔 인권기관에 관련 자료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약 15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Q1 이번에 어떤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셨는지요?
와타나베 미나 9월 20~22일 광주에서 개최되는 ‘유네스코 세계인권 기록유산 국제학술회의’를 방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 등재를 신청한 일본위원회로서도 인권침해 기록 그 자체가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한 역할과 해외에서 기록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거든요. 회의가 광주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국립 5.18 민주묘지와 5.18 민주화운동기록관도 방문했는데, 한국의 민주화 실현을 위해 중요한 투쟁을 한 광주 사람들의 긍지, 기록을 남기는 것에 대한 신념은 인상적이었습니다.
Q2.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이하 wam)이 설립된 배경과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와타나베 미나 1990년대 초 한국을 시작으로 각국에서 일본군‘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일본 정부에게 사실과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 보상, 교육에 나설 것을 요구했습니다. 2000년 12월에는 도쿄(東京)에서 ‘일본군 성노예제를 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하 ‘법정’)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피해 8개국, 가해국 일본, 여성단체와 인권단체를 주체로 한 국제시민사회가 주최한 민중법정으로, 당시 법에 따라 천황 히로히토를 포함한 10명의 군 고위 관계자를 일본군 성노예제의 책임자로 판결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법정을 제안하고 주도했던 마쓰이 야요리(松井 やより, 저널리스트・여성인권활동가) 씨가 2002년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wam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기술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법정’을 개최하기 위해 수집한 증언, 공문서, 기타 기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싶다는 것은 마쓰이 씨뿐 아니라 ‘법정’에 관여했던 우리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무력분쟁하에서 두 번 다시 성폭력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피해와 가해를 후세에 전달하고 평화를 만드는 활동 거점을 구축하고자 건설위원회를 조직하고 모금 캠페인을 실시하여 3년 후인 2005년 도쿄의 니시와세다(西早稲田)에 wam을 설립했습니다.
wam은 비록 작은 박물관이지만 지난 12년간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특별전을 15회 열었습니다. 또 특별전에 맞추어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카탈로그와 서적을 발행하는 교육 사업, ‘위안부’ 핫라인, 위안소 지도 작성, 웹사이트에 ‘위안부’ 관련 공문서 공개 등의 조사연구 사업,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한 주장(advocacy)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Q3. 2005년 wam이 설립되고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사회나 언론의 대응에 변화가 있었는지요? 있었다면 어떻게 변화했는지요?
와타나베 미나 wam은 일본 패전 후 60년이 되는 2005년 여름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대중 매체는 전쟁에 대한 깊은 자기반성은 하였지만 wam의 설립을 포함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보도 분량의 변천을 보면 2007년 3월 이후 보도가 부쩍 늘어납니다.
현직 총리대신이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제1차 내각)이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사실을 부정해서 국제적 비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007년 7월 미국 하원이 ‘위안부’ 결의를 채택하자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본 지방자치단체 의회에서도 일본 정부에게 사죄 등의 대응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합니다. 2011년 8월 한국 헌법재판소가 한국 외교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했습니다만 그후 시작된 한 . 일 정부의 외교 교섭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2013년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전 오사카 시장이 “‘위안부’는 필요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이러한 정치가에 의한 사실 부정과 폭언이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12년 제2차 아베 정권이 출범하고, 2014년 아사히신문이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 씨의 강제연행에 관한 기술이 “허위였다”고 보도한 후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아베 정권이 벌인 네거티브 캠페인의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이 무렵부터 지방 의회의 의견서도 “일본의 명예를 지킨다”는 주장으로 바뀌었고 2015년 한 . 일 합의 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신문 보도가 “일 . 한 ‘합의’로 끝난 것이다”는 논조로 바뀌었습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Q4. 지난해 10월에는 “전시관을 철거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는 협박 엽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하시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혹시 이러한 협박이 wam 운영이나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요?
와타나베 미나 일본군 성노예제의 책임자로 천황 히로히토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wam은 개관할 때부터 이러한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만약 패널 등 전시물이 공격으로 손상된다고 해도 즉시 새로 다시 만들어 전시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지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일은 전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역사에서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그 피해를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없었던 일로 여겨졌던 역사적 진실을 또 다시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두 번 다시 지워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wam의 활동 방침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단, 이전과는 달리 개관 시에 스태프와 자원 봉사자가 복수로 근무하고 방문객의 언동에도 주의하고 있습니다.
Q5. 일본군‘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와타나베 미나 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기록물과 정의를 요구하는 그분들의 싸움,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사실을 증명하는 일련의 문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에 관계없이 이미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해 증언과 싸움의 기록이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고 유네스코로부터 인정받고 확실히 보존된다면 피해자 여성들은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들의 피해 기록이 사라지지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피해 회복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또 등재가 결정되면 기록의 보관과 공개가 가능해지고 동시에 연구를 촉진시킬 책임이 다음 세대에게 부과됩니다. 등재를 신청한 8개국이 최신 보관 기술과 공개 방법 등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을 가속화할 것입니다. 기록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유네스코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장점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신청한 기록물이 등재된다면 전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고 인권 회복을 위해 싸워 온 기록의 존재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와 지원자에게 큰 격려가 될 것이고, 여성들의 투쟁 기록 보존 운동에 있어서도 틀림없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유네스코는 역사를 판단하는 기관은 아닙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행동은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기록유산의 등재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Q6. 이번에 한국 국가기록원을 방문하셨는데 성과는 있으셨는지요?
와타나베 미나 한국 국가기록원장의 ‘위안부’와 역사 사료에 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고 국가기관이 어떻게 기록물을 보관하고 국민에게 전달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어서 매우 유익했습니다. 자료실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덕에 일제강점기 당시의 기록 관리 현황을 볼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공문서의 원본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문서의 복사본을 꼭 입수하고 싶은데, 물론 원본에서 받은 감동은 복사본에서는 느끼기 어렵지요.
Q7.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관련 역사관과 기념물 등도 둘러보셨는데 어떠셨는지요?
와타나베 미나 이번에는 총 네 곳의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대구시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파주시에 있는 ‘평화를 품은 집’과 ‘타임캡슐’은 모두 민간에서 세운 작은 박물관이지만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전시, 제노사이드(genocide)를 생각하는 패널, 귀중한 실물 자료 전시 등 여러모로 아이디어를 낸 세심한 전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산의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크고 훌륭한 건물이었지만 전시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간 박물관이 충실한 전시를 하고 다양한 전달 방법을 활용하며 축적된 힘도 있기 때문에, 국가기관이 ‘결정판’을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Q8. wam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와타나베 미나 현재는 일본인 ‘위안부’ 피해에 초점을 맞춘 “일본인 ‘위안부’의 침묵-국가에 관리당한 성”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메이지 이후 근대 공창 제도부터 일본군‘위안부’ 제도, 일본 패전 후 미군 병사를 위한 위안소,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성을 계속해서 관리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일본 여성들이 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기획입니다. 내년 여름까지 전시를 하는데 여러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시기는 검토 중입니다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과 ‘위안부’에 관한 전시는 반드시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해 ‘전쟁 책임’과 함께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개념이 논의되었는데, 식민지 지배 자체를 보지 않고 한반도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피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획은 꼭 한국 연구자의 협력을 받고 싶은데 이 자리를 빌려 한국 연구자분들께 협력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wam이 중점을 두고 시작한 활동이 “일본군‘위안부’ 아카이브”의 구축입니다.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증언, 활동기록과 함께 일본 시민의 지원 활동 내용을 50년이 지난 후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남겨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2015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배경에는 지원 활동을 해온 분들이 고령화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계시는 현실이 있습니다. 기록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 각지의 지원자들과 연계하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Q9.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wam 활동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와타나베 미나 간혹 한 . 일 화해를 위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성폭력, 성노예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권리를 어떻게 회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현재진행형의 인권침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한국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나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