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출범 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후쿠다 수상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고, 올 7월 홋카이도에서 열리는 주요 8개국정상회담(G8)에 이명박 대통령의 참가를 요청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한국 새정부에 대해 역사 및 영토문제에서 과도한이념적 대응을 자제하고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의 구축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에 호응하며 실용외교를 바탕으로'양국관계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화답하였다. 또 더 이상 "사과하라, 반성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미래지향적이고 성숙한 한ㆍ일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의지를 강조하였다. 아마도 4월 20일 이대통령의 방일을 기회로 양국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될 것이다.
그런데 새 정부 출범 초기의 이러한 양상은 낯익은 모습이다. 사실 한ㆍ일 관계에서'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이라는 용어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 수상 간에이루어진 정상회담에서 채택된'한ㆍ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명문으로 제시되었다. 노무현정부 초기에도 이 달콤한 용어는 다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문제와 관련된 각료들의 문제발언, 시마네현에 의한'다케시마의 날'제정, 역사교과서문제 등에 의해 훼손되었고 바로 갈등관계로 전환되었다. 양국관계를 보면 초기에는 미래지향을 내세웠다가도 과거사나 독도문제가 나오면 휴화산처럼 식었던 여론이 금방 폭발하면서 악화되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과거사에 대해 한국이 일본에게 더 이상 사과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둘러싼 논쟁은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고 한국인에게도 정신위생상 좋지 않다. 그것은 이제 일본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이다.
단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선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깨끗한 청산과 확고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21세기를 향한 일본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도, 일본인의 인간으로서의 해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의 경제적인 규모에 걸맞은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아시아인들끼리의 성숙한 만남을 위해서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죄할수록 관계가 더 나빠지고, 잘못을 인정하면 호국영령을 모독하게 된다는 발상은 너무나 소아적인 인식이다. 엄연히 존재하였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오는 멍에를 언제까지 지고 갈 것인가? 명확한 인정과 반성 위에상대방의 이해를 얻어내는 것이 훨씬 떳떳하고 성숙한 태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ㆍ일 관계 악순환을 끊는 법
1945년의 해방은 식민지 국민뿐 아니라 일본민중들에게도 전쟁과 군국주의라는 폭력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쟁에 참여한 영령은 물론 전범(戰犯)까지 포함하여 모셔져 있지만 전쟁에 반대하다 순국한 인물은제외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1945년의 패전은 언제까지나 패배일 뿐이다.
역사문제에 관해서는 일본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중국과의마찰 또한 못지않게 심각하다. 유럽의 경우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도 현재 하나의 공동체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있지 않은가? 동북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성숙한 관계가 왜 형성되지 못할까? 동북아에서 성숙한 세계인으로서의 만남은불가능한가?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앞장서 치고나가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한국이 그 역할을 가장 잘 할 수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동북아시아가 평화의 시기일 때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허브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반면에 전쟁 시기에는 항상 대륙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전장으로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따라서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필요하다. 또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충돌을 조정하며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주의라는 오해를 받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북아 새로운 국면 창출을 위한 한국의 역할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동질성과 공통의 비전을 제시하여 양국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 갈등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 중국을 대상으로 한 양국 관계적 인식에서 벗어나 세계문명사에 기반한 보편적인 관점과 동아시아 지역사를 조망하는이론을 확보해야 한다. 그 기반 위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한국이 중국이나일본보다 더 세계화되고, 한국인이 성숙한 세계시민이 되는것이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선린우호의 궁극적인 방향은 동북아인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상호이해의 폭을넓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씨로부터'주체와 공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시사를 받았다. 그는 일본인의 주체의식과 책임의식의 부족함에 대해'애매한 일본인'이라고 비판하면서, 우선 개인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자아실현의 확대과정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공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개인의 주체성을 회복해야만 공생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로 엄중하면서도 개방된 사고방식이다. 개체와 전체, 특수성과 보편성의 동태적 조화이며, 민족ㆍ문화의 다원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성에의 추구와 수렴을 놓치지 않는 자세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공자가 군자의 자세라고 말한'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과도 서로 통하는 것 같다. 군자란 천명을 알고 따르는 자인데 요즈음말로 하면'세계인'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한ㆍ일 관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신시대의 평화공존을 가능케 하는 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동북아 삼국의 국민 모두가 진정한 국제화를 실천하는 바탕위에서'성숙한 세계인'으로 만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