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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1870년대 기록으로 본 울릉도와 나가사키 지역의 동향
  • 박한민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2월 28일 재단 독도연구소는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와 함께 발굴 자료로 탐색하는 독도 연구의 새 지평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여기서 필자는 “1870년대 해외 기록에 보이는 울릉도·독도와 태정관지령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발표 요지와 다뤘던 주요 자료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한다.


 


2월 28일 심포지엄 당시 온라인 진행 화면



1870년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태정관지령 발포

 

1870년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 관계는 각국이 영토를 획정하는 문제로 인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의 타이완 침공(18745)과 청일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치시마-사할린 교환조약(18757),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의 일본령 편입(1876) 등이 있었다.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영내를 무단으로 침입해 공격한 사건 이후로, 조선이 조일수호조규를 체결(18762)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것도 이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지적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시마네현(島根縣)에서는 죽도(竹島) 1의 판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두고 상급기관인 내무성(內務省)에 문의했다. 역사적 연혁이 담긴 관련 서류를 검토한 후, 내무성은 태정관(太政官)에 최종 판단을 요청했다. 태정관은 죽도 외 1도는 본방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지령을 1877년 329일에 내렸다. 여기서 죽도 외 1는 울릉도와 독도를 가리킨다. 태정관지령의 가치에 주목해 지령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국내 학계에서는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왔다.

 

 

청국-일본-러시아 정기항로 운영과 울릉도 목격 빈도의 증가

 

1870년대 정기항로가 개설돼 청국 상하이(上海)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간 기항지로 활발하게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며 많은 정보가 모이던 지역은 나가사키(長崎)였다. 이곳은 조선으로 건너가기 전에 경유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나가사키를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오고간 자들은 빈번하게 울릉도를 목격했다. 이것은 송도(松島)’를 개척해 보겠다는 일본인들의 청원서 제출로 이어졌다. 울릉도의 풍부한 목재와 해산물 채취, 그리고 광산 개발을 통해 이익을 취하겠다는 욕망을 표출한 것이었다. 울릉도 개척에 대한 열망은 비단 민간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875년 상반기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시찰하고 귀국, 이듬해부터 이 지역에 무역사무관으로 주재하던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나가사키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고갈 때 청국 상하이에서부터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던 기선 드래곤(Dragon) 호를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배를 이용한 승객들은 동해에서 울릉도를 자주 목격했다. 그 경험담은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노스 차이나 헤럴드(The North China Herald)’지에 실리기도 했다. 1876715일 기사에는 울릉도의 험준한 바위와 울창한 비탈면주변의 깊고 푸른 물결과 현저하게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무역사무관 세와키는 당시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던 정세를 거론하며, 이들 국가가 울릉도와 조선 북부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 와중에 일본에서 선수를 쳐 송도개척에 나설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나가사키현령(長崎縣令)송도개척 구상

 

세와키가 송도개척을 주장하던 무렵, 나가사키현령 기타시마 히데토모(北島秀朝)송도의 개척 필요성과 구체적인 착수안을 내무경(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전달했다. 그가 보낸 문건은 송도 개도의 건에 대한 문의송도 개척 착수 급무의 개략이었다. 기타시마는 울릉도가 나가사키와 블라디보스토크 간 항로에서 요충지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프랑스 등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는 나가사키 현이 주도하는 송도개척 방안을 내무성에서 검토하고 조속히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첨부한 개척안은 12가지 항목으로, 세와키나 다른 일본인이 제기하였던 송도개척안과도 내용상으로 유사한 점이 많았다. 관료로서 그는 송도를 개척하고 등대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내무성과 공부성 관리들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나가사키 현재 전경

 


시마네현 외 지역도 태정관지령을 따르라고 회신한 오쿠보

 

오쿠보 내무경은 이해 818일자로 기타시마에게 회신했다. 오쿠보는 시마네현의 문의로 과거 조선과 막부가 주고받은 서류를 조사했고, ‘송도개척 문의 건은 본방과 관계가 없다고 결정해 시마네현에 회신한 경위를 서술했다. 이 내용은 태정관지령을 가리킨다. 이어서 나가사키현도 그 취지에 따라야 함이 마땅하다고 기재했다. 내무경의 이 공문은 태정관지령이 일본 내 다른 지방에도 적용됐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란 점에서 중요하다. 조선으로 부임하기 전 나가사키를 들른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이 문서를 입수했다.
이 점은 외무성도 내무성의 결정을 공유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가사키 이외 지역에도 이 같은 공문이 발송된 사례가 있는지 앞으로 추가 조사와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출전: 宮武外骨 編, 壬午鷄林事變,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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