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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가다
고구려 고도, ‘집안(集安)’
  • 고광의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장군총에서 본 집안(2005)

장군총에서 본 집안(2005)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는 백두산에서 뻗은 노령산맥이 압록강을 끼고 분지 형태를 이뤄 만주에서도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에 속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희생으로 쓰려던 돼지가 달아나자 쫓아가 붙잡은 곳이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이라고 했는데 바로 집안 지역이다. 그곳은 산수가 심험해 병혁을 피하고 땅은 오곡에 맞으며 산짐승과 물고기 등의 산물이 많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서기 3년에 유리왕은 도읍을 국내로 옮겼고 다시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집안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이후에도 집안은 부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고구려 700년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장군총(2019)

 


고구려고묘박물관(2019)

 


산성하고분군(2019)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왕릉과 귀족 무덤

 

2000년대에 들어 중국 정부는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일환으로 진행된 집안 지역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함으로써 가히 집안은 고구려 시대 이후 최대의 발전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중 간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의 충돌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천 수백 년 동안 묻혀있던 고구려의 실체가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집안 지역에서 발견된 규모가 큰 적석묘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대략 24기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태왕릉, 장군총, 서대묘, 임강묘, 우산992호묘, 우산2110호묘, 산성하전창36호묘, 칠성산211호묘, 칠성산871호묘, 마선2378호묘, 천추총, 마선2100호묘, 마선626호묘 등 13기는 왕릉으로 확정했고, 나머지 11기는 왕릉급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은 모두 7층의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올린 계단식적석묘로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지만 심하게 무너져 일부만 남아있고 무덤 위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글자가 찍힌 벽돌이 발견됐다. 이 두 무덤은 고구려 적석묘 발전 단계에서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인지 장수왕인지 논쟁이 되고 있다.


집안 지역의 고분 중에서 가장 서쪽인 마선향 끝자락 언덕에는 훼손된 커다란 돌무더기가 보인다. 이 서대묘는 분구의 가운데 부분이 완전히 드러나 있어 학계에서는 전연 모용황의 침입 때 파헤쳐진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구하를 거슬러 가면 평지성인 국내성과 짝이 되는 환도산성이 나타나고 그 아래 계곡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적석묘와 봉토묘가 뒤섞여 신비롭게 조화를 이룬 산성하고분군이다. 형무덤이나 아우무덤과 같은 중대형 적석묘와 ()’자묘, 미인총, 귀갑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벽화무덤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 정비를 마치고 고구려고묘박물관(高句麗古墓博物館)’으로 개장했다.

 

 


광개토태왕비(2010)

 

광개토태왕비와 집안고구려비

 

집안 시내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광개토태왕비가 있다. 비각 안에 높이 6.39m, 무게 약 37톤에 달하는 선돌 형태의 거대한 사각형 돌기둥이 우뚝 서 있다. 비면은 석회가 입혀지고 수많은 탁본을 해댄 탓에 검게 보이지만 원래의 석질은 연한 녹회색을 띠는 응회암의 일종이다.


글자는 예서의 형태지만 해서, 행서, 초서 및 전서의 서사법이 혼용돼 있어 당시 금석문 서체 중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필자는 이 서체를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천하관이 투영돼 독창적이고 예술적으로 완성된 광개토태왕비체(廣開土太王碑體)’라고 부르고 있다.


비문은 고구려 왕조의 유래와 광개토태왕의 생애 및 정복 활동 그리고 선대 왕릉의 수묘인 관련 법령 등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일제는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고 해석하고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날조하기도 했다.


집안 지역에서 광개토태왕비 이후 거의 100여 년 동안 새로운 비석이 발견되지 않다가 2012년에 마선하(麻線河)에서 비석이 하나 출토됐다. 비는 길이 173cm 정도의 화강암으로 광개토태왕비와는 형태가 다른 판상형으로 머리 부분이 뾰족한 규수형 비이다. 비문에는 元王始祖鄒牟王之創基也’, ‘河伯之孫등 광개토태왕비에서 나타나는 구절과 유사한 문구들이 나타나고 守墓者’, ‘烟戶頭’, ‘四時祭祀등의 표현들이 보이고 있어 광개토태왕이 생시에 세운 墓上立碑의 실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은 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서 일시에 수십 편의 연구 성과를 쏟아낼 만큼 흥분한 사건이었다. 현재 이 비석은 집안박물관에 탁본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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